인권위 "성소수자 존재 파악 지침 마련 요구…정보 없어 정책수립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아"
성소수자 단체 "통계상 한국 성소수자는 0명…민간 표본수집 한계, 외국 자료로 추정"
"청소년 성소수자, 성인과 달리 가정·학교·쉼터 말고는 선택지 없는 데도 쫓겨나"
"아이·노인·장애인 성소수자 통계 더욱 시급"…해외 통계 '성정체성·성지향성' 조항 포함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실태를 파악할 통계 조사가 전무해 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 혐오를 개선할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 부처들에게 국가통계·실태조사에서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 존재를 파악하도록 조사항목을 신설하라고 권고했다. 정부 부처의 수용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인권위는 국무총리에게 중앙행정기관 등에서 진행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보건복지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 장관과 통계청장에도 각 기관이 시행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등에 성소수자 조사항목을 신설하라고 요구했다.
일상생활 전반에서 편견으로 인한 차별, 혐오를 경험하는 데도 정부에서 실시하는 국민보건의료실태통계조사 등 통계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를 별도로 수집하지 않아 정책수립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인권위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호림 행동하는성소수자연대 활동가는 "지금 한국의 국가 통계에 참여자가 성소수자인지 확인하는 문항이 없다보니 한국에서는 통계상으로 성소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한국 인구의 몇 퍼센트가 성소수자인지도 알 수 없고 지역별, 연령대, 소득 등 인구 통계학적인 정보도 전혀 없기 때문에 외국 자료로 추정치를 간신히 구하는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민간에서 연구자들이 연구를 할 때도 대표성 있는 국가 통계 자료가 없어서 직접 표본을 모아야 하는데, 직접 구한 표본은 숫자가 적어 한계가 있다"며 "성소수자들이 일터, 의료시설, 공공기관 등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도 차별에 노출되지 않는 환경이 필요한데, 근거가 될 통계자료가 없다 보니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한 관계자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교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또는 단순히 '성소수자 같다'는 이유로 또래 친구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아웃팅' 등 2차 가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들도 자식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가정폭력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가출하는 상황도 많은데 성소수자 청소년 위기 상황에 대한 국가 통계가 없어서 개선할 수 있는 지침, 정책도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체 통계에 따르면 탈가정한 성소수자 청소년 중 64%가 가정폭력을 겪었고, 청소년 쉼터로 가고 싶어도 '성소수자라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거부를 당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청소년은 성인과 달리 가정과 학교, 쉼터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데 여기서도 거부를 당하면 정말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속히 통계자료를 근거로 청소년 기관, 학교 내 교육이나 매뉴얼, 지침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지학 다양성연구소소장은 "성별 구분이 불편하거나 싫은 사람들이 아예 조사에 참여하지 않고 국가에서도 조사하지 않으니 통계상 없는 인간,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어 정책 대상에서도 밀려나고 있다"며 "연구도 없으니 병원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왜 아픈지 알 수 없고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는 병원과 금융기관에서는 성소수자가 왜 방문을 꺼리는지 등의 문제제기 자체가 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이어 "아이나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들일수록 정확한 통계 근거가 있어야 정책 반영이 되는 만큼 하루 빨리 성소수자 통계 자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국가 통계에 성정체성, 성지향성 등을 묻는 조항이 존재해 성소수자에 대한 통계 자료가 비교적 잘 정리돼 있고, 이를 정책 근거로 삼고 있다. 학술지 비판사회정책의 '국가 대표성 있는 설문 조사에서의 성소수자 정체성 측정 필요성' 논문에 따르면, 미국은 '국가 성인 흡연 실태 조사(National Adult Tobacco Survey)', '국가 건강 증진 조사(National Survey of Family Growth)' 등 11개 통계 조사에서 성소수자를 묻는 조항이 있다. 이와 함께 '캐나다 보건 조사', '영국 사회 인식 조사' 등 캐나다의 9개, 영국의 13개 국가 통계 조사에서도 성소수자 여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