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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6>] 역전의 용사


입력 2022.05.20 14:01 수정 2022.05.24 11:00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6화 역전의 용사


푸른 4월의 하늘 아래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2차선 도로를 따라 팝콘을 잔뜩 부어놓은 듯 벚꽃 행렬이 뱀처럼 길게 꼬리를 물었다. 그 밑에 내장처럼 혹은 터널처럼 아스팔트길이 뚫려 있었는데 이따금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머리 위에서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사천 뿐만 아니라 인근 강주에까지 호가 나 있어 상춘객들의 발길이 잦은 이 도로는 수령이 오래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제각각 기묘한 형태로 가지를 펼친 채 아스팔트길을 궁륭처럼 감싸 안았다.


노란 택시 한 대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상춘객들을 지나치며 벚꽃터널을 내달렸다. 택시 꽁무니에 먼지 대신 꽃잎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택시 안에선 이문세의 노래 ‘알 수 없는 인생’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져 안경 쓴 얼굴이 더욱 길어 보이는 이철백이 꼿꼿한 자세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 시간을 되돌릴 순 없나요 / 조금만 늦춰줄 순 없나요 / 그 시절 지난날이 그리워요.


이철백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눈부시게 화창하고 꽃향기 가득한 봄날, 김석규를 면회하러 가는 길이 마치 학창시절 소풍을 가는 것처럼 아련한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 까까머리 고교시절 이철백은 김석규, 한종탁과 함께 문청 삼총사로 불렸는데 봄 소풍을 간 바닷가 방풍림 송림공원에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술을 마시다 들켜서는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었다.


술과 문학은 실과 바늘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라며 문청 삼총사가 고교 때부터 술을 마신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삼총사는 문학보다 술에 탐닉한 결과 문학적 성과는 없었고 술로 인한 부작용만 잔뜩 가지게 되었다. 한때 소설 쓰는 경찰로 지역문단의 관심을 받았던 김석규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술에 관한 한 김석규의 도플갱어라 불리는 한종탁은 단주와 음주를 반복하다가 현재는 금주한다며 잠행에 들어가 있었다.


이철백은 벚꽃 가로수 길을 주행하다 오른편으로 핸들을 틀어 콘크리트가 포장된 좁다란 농로에 진입했다. 농로 양 옆으로는 마른 흙을 뒤집어쓴 논들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농로를 지나자 이번엔 야산 쪽으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계단식 밭들이 연접해 있는 오르막길을 지날 때까지 주위에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야산에는 야생 벚나무들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서니 분지처럼 움푹 들어간 지형에 단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두세 동이 벚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나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시설이었는데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수용자들이 죽거나 흩어져서 황폐화 되었던 건물을 5.16이후 어느 독지가가 단장해 부랑아 수용시설로 운영했었다. 그러다가 10.26이후 신군부가 들어서자 독지가는 사양 산업이 된 부랑아 수용을 중단하고 과감하게 정신병원으로 바꾸어 초대 원장 자리에 올랐다. 지금은 그 아들이 제2대 원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김석규는 의무과장 뒤편의 창밖을 오래토록 응시하고 있었다. 창 너머 정원의 벚나무들이 함박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겨울 중에서도 한겨울인 모양이었다. 지금이 몇 월인가. 12월, 1월, 2월 아무려면 어때. 그런데 실내는 난로를 켜지 않았어도 훈훈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마치 봄날의 어느 하루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함박눈이 문득 벚꽃 무더기로 보이기도 했다. 왜 눈에 헛것이 보이지. 내가 드디어 미쳐버렸나. 에이 아무려면 어때.


김석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김석규의 얼굴은 거무칙칙한 빛깔에 살점 하나 없이 강팔라 보였다. 언제 넘어져 깨진 건지 툭 불거진 광대뼈 위로는 피딱지가 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의무과장 이희수가 메마른 음성으로 물었다. 어제 과음을 하고 노래방을 다녀와서 그런지 목에 가래가 낀 듯 깔깔했다. 이희수는 누런 때가 낀 가운을 걸치고 앉아있었다.


“후송 오기를 잘했다 생각합니다.”


“후송요?”


“군인이 병원에 실려 오면 그게 후송이지 뭡니까?”


김석규가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반문했다. 그 눈길에, 그것도 모르면서 의무과장을 하고 있냐는 질책이 서려있었다. 이희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미소를 지으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유 대한의 군인입니다.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란 말이에요.”


김석규가 눈에 힘을 주고 이희수를 노려보았다. 이희수는, 누가 뭐랍디까? 하는 속엣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주억거려 동의를 표했다.


“전쟁터에서 산화하는 것이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 국군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후송을 완강하게 거부했었는데. 아, 이제 무슨 낯으로 전우들을 볼 수 있을지….”


김석규가 말끝을 흐리며 눈길을 돌렸다. 진심으로 전우들에게 미안한 듯 김석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후송은 군인에게 치욕이 아닙니다. 더 나은 전투력을 만들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죠. 김 선생님,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계급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희수는 얼토당토않은 김석규의 말을 차지게 받아주며 최대한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환자가 의료진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치료의 기본이었다.


“계급이요?”


김석규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보면 초탈했다 여겨질 수 있겠지만 워낙 얼굴색이 거무칙칙해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계급이 없는, 거 뭐랄까. 음, 이순신 같은 존잽니다. 백의종군하는 게지요. 군인에게 계급이 뭐 대수겠어요?”


“그럼 장군이시군요.”


이희수가 짐짓 놀라운 표정으로 반문하면서도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찼다. 장군은 장군이지. 바다에선 고래가 왕, 군대에선 장군이 왕이니까 당신 같은 술고래는 최소한 장군은 되겠지, 쯧쯧.


김석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언론대응기법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이스라엘의 핵 보유정책에서 맹위를 떨치는 NCND기법을 김석규가 천연덕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김 장군님, 앞으로 장군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허허.”


김석규가 천정 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석규의 NCND기법은 채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아마 김석규는 이스라엘과 다르게 핵이 없는 모양이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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