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 현금확보', '삼성전자 설계 기술확보' 이해관계 일치
삼성전자 단독으로 지배지분 확보시 반독점 문제 걸려
현대차그룹에 보스턴 다이내믹스 매각 당시처럼 일부 지분 남길 수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설계(팹리스) 기업 ARM 인수 추진을 사실상 공식화하면서 구체적인 인수 방식에 관심이 모아진다. 반독점 문제가 걸려있는 만큼 다른 반도체 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하거나, 기존 ARM의 대주주로 칼자루를 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주도적으로 지분 분할 매각 등의 해법을 제시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22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전날 영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ARM 경영진과의 회동은 없었지만, 다음달 손정의 회장이 서울로 온다. 아마 그때 그런(ARM 지분 매각) 제안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대형 M&A(인수합병)와 관련된 사안을 사전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해당 거래에 대한 논의가 이미 상당부분 진척됐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인수 조건을 놓고 눈치싸움을 하는 단계라면 굳이 대외적으로 인수 의지를 천명하며 패를 보여줄 이유가 없다.
ARM 지분 75%를 보유한 소프트뱅크를 이끄는 손 회장은 이 부회장과는 지난 2019년 7월 방한 당시 만남을 가졌고, 평소에도 전화통화로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현 상황이 소프트뱅크가 ARM 매각을 놓고 ‘밀당’을 할 처지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정보기술(IT) 업체 투자를 위해 조성한 비전펀드가 올 상반기 500억달러(약 70조원) 가까운 손실을 내며 그룹 전체 실적에서도 5조2000억엔(약 50조원)의 적자를 냈다. 현금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동통신업체 T모바일US, 차량 공유서비스업체 우버, 부동산 플랫폼 오픈도어, 부동산 중개업체 KE홀딩스 등의 지분을 정리하고 알리바바 주식 매각을 담보로 선불 선도계약을 하는 등 현금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기업 가치가 5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ARM 지분 매각은 소프트뱅크의 고민을 일거에 해소시켜줄 수 있다.
시스템반도체 사업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도 ARM은 포기하기 힘든 매물이다. ARM은 세계 1000여개 기업에 반도체 기본 설계도인 아키텍처를 제공하고 로열티(사용료)를 받는 팹리스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모바일 칩 설계 분야에서 ARM의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애플, 퀄컴, 화웨이, 미디어텍 등 세계적인 IT‧팹리스 업체들은 물론, 삼성전자도 ARM에 돈을 내고 아키텍처를 사용한다.
삼성전자로서는 그동안 미미했던 반도체 설계 분야 경쟁력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ARM 인수를 통해 마련할 수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거래 당위성은 모두 충분하지만, 문제는 반독점 규제다. ARM의 점유율이 워낙 높은 데다, 삼성전자와 같이 이 회사를 인수해 아키텍처-팹리스-파운드리를 수직 계열화할 수 있는 기업이 인수할 경우 경쟁 팹리스 업체에 대한 라이선스 로열티를 올리거나 아예 라이선스를 봉쇄할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앞서 지난 2020년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ARM 인수를 추진하다 규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손정의 회장이 내달 방한해 이재용 부회장과 머리를 맞대더라도 ‘가격 협상’ 보다는 ‘반독점 규제 회피를 위한 묘안’ 마련에 대한 논의를 우선시할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단독 인수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다른 기업들과의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M&A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엔비디아의 인수 계획 무산 이후 인텔, 퀄컴, SK하이닉스 등이 ARM에 관심을 보인 만큼 이들과 손을 잡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매각 주체인 소프트뱅크가 구체적인 매각 플랜을 짜놓고 원매자들과 개별 접촉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미 한 차례 매각 무산을 겪은 손 회장이 반독점 규제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상태에서 이 부회장을 찾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삼성전자 등에 ARM 지분을 나눠 매각하되, 소프트뱅크가 일부 지분을 유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프트뱅크는 지난 2020년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에 보스턴 다이내믹스 지분 80%를 매각하면서 나머지 20%는 남겨뒀다. 재무적 투자자(FI)인 자사가 대주주로 남는 것보다 전략적 투자자(SI)에 지배지분을 넘기고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높여 잔여 지분 가치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택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ARM 역시 사업 연관성이 큰 삼성전자 등에 지배지분을 넘기더라도 일부 지분을 남기고 기업가치가 더 성장할 타이밍을 노릴 수도 있다.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ARM 지분 75% 중 26% 이상을 남겨 나머지 지분 25%를 보유한 비전펀드를 포함한 FI가 절반 이상의 지분을 유지하는 구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 반독점 규제를 피하기도 수월하다.
재계 관계자는 “손 회장이 엔비디아로의 매각 실패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반독점 규제를 피해 거래를 성사시키면서도 투자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판을 짠 상태에서 이 부회장을 만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