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49화 조절망상
실제로 김석규는 아무 생각 없이 무방비로 앉아있다가는 조절망상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금주 방법 중의 하나로 터득한 ‘폐해연상기법’을 동원해 보기로 마음먹고 지난 기억들, 특히 술 때문에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치 시궁창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각과 후각을 자극해서 구역질을 올리는 것처럼 혐오스런 기억들로 몸이나 뇌에 이상반응을 일으켜 저절로 술을 멀리하게 하는 기적을 얻고 싶었다.
김석규는 고주망태가 되어 아들에게도 무시당했던 기억, 술을 자제하지 못하는 남편을 둔 덕에 사시사철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 이혼서류를 디밀던 아내,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시원하게 술을 산 것까지는 좋았으나 술자리가 지나쳐 주정을 하게 되고 이튿날 따가운 눈총 속에서 비지땀을 흘렸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또한 자신이 다뤘던 주취자 범죄 중에 살인, 강간 등 강력사건을 염두에 두며 술에 대한 혐오감정을 극대화하려 애썼다.
그러자 폐해연상기법을 냅다 걷어차 버리듯 연이어 떠오른 기억은 결코 굴복한 적이 없는 김석규의 빛나는 일관성이었다. 술로 인한 그 어떤 몹쓸 일들도 김석규의 음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이었다. 아내의 협박도 아들의 경멸도 김석규의 초지일관 음주를 감히 저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김석규의 음주가 단순한 음주가 아닌 잠수함의 토끼론에 근거한 탄탄한 음주였기 때문이었다.
루마니아 출신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2차 세계대전 때 잠수함 수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잠수함 속엔 토끼가 있었는데 토끼는 산소가 부족한 것을 제일 먼저 느끼는 존재였다. 그래서 토끼가 시들해진다 싶으면 잠수함은 수면으로 올라와 공기를 보충하곤 했다. 어느 날 잠수함의 토끼가 호흡곤란으로 고통스러워하다 죽어버리자 함장은 탁한 공기에 비교적 민감한 게오르규를 토끼 대신 그 자리에 앉아있게 했다.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게오르규는 말했다.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라고. 그 귀동냥을 바탕으로 김석규는 한술 더 떠 아내와 아들에게 강변했다. 경찰이기 이전에 작가인 나는 잠수함 속의 토끼이기 때문에 사회의 부조리에 제일 먼저 반응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괴로움에 애가 타서 술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물론 김석규의 아내 박미옥과 아들 정우는 콧방귀를 뀌었었다.
폐해연상기법을 동원한지 열흘이 흘렀다. 김석규는 문득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보글보글 끓는 찌개나 얼큰한 탕을 앞에 두고 소주 한잔 마시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사람이 문제지 술이 무슨 죄가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문제는 김석규 자신이지 술이 아니었다. 김석규는 애당초 술을 잘못 배워 이제는 술 마실 자격조차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 지나도 /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하운,「전라도길 — 소록도 가는 길에」1949. 4. 발표>
한때 한센병이 천형이라 불렸다는데 그분들껜 죄송한 비유지만 술 마시지 못하는 고통을 천형이라 할까. 술 마실 줄 알지만 술 마셔서는 안 되는 인생을 천형이라고 할까. 그래 나는 천형을 받은 것이다. 이제껏 술을 무지막지하게 퍼마신 원죄가 있으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천형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금주의 고통 속에 나를 던져 놓는다. 가도 가도 먼 금주의 길을 피울음 울면서 걸어가야 한다. 가다가 지치면 무릎 꿇고서라도, 기어서라도 가야 한다. 완전한 금주의 그날까지 절대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폐해연상기법 동원 20일째가 되자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김석규는 경이로웠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 오래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입원한 지 4개월이 지났으니 어찌되었건 금주를 한 건 그 기간만큼이나 되었다. 혹자는 그게 김석규의 승리가 아니라 병원의 승리라 폄하하겠지만 술꾼이 술을 먹겠다고 마음먹으면 병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에서도 술을 마시게 되어있는 것이다. 김석규는 어렵게 이루어낸 금주를 쉽게 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지속 가능한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금주를 계속하려면 술이라는 낱말조차 금지어로 정해야겠다. 입에 올리는 건 물론 뇌리에 떠올려서도 안 되겠다. 술을 계속 끊어야 한다는 다짐이나 부담감도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내 인생에 술이란 게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냥 자연스럽게 술이란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게 해야 할 일이다. 그러자면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일 듯싶었다. 그래서 뇌리에 술을 금지어로 등록했고 열흘이 지났다. 저녁시간대에 조깅을 시작한 건 성과였지만 술이란 단어를 뇌리에서 퇴출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전보다 자주 술에 대한 연상이 떠오르면서 김석규는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술을 끊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아슴푸레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술 마시면 실수를 많이 해서 그렇지.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대취할 때까지 마시고.’ 김석규가 스스로에게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또 다른 김석규가 반문했다. ‘술 마시면 다들 실수하고 그러는 것 아닌가? 원래 취기가 오르면 술을 더 찾다가 결국 떡이 되는 거고.’ 김석규는 ‘정말 다 그러는 건가?’ 하다가 ‘그러고 보면 다 그런 것 같기도 해.’ 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
“망할 여편네. 내가 나가기만 해봐!”
주만수가 잔뜩 화난 얼굴로 103호 병실에 들어섰다. 김석규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두뇌를 천천히 게으르게 빠져나왔다. 주만수는 알코올성 조울증 환자로서 어떤 날은 온종일 말 한마디 없다가도 어떤 날은 잠시도 쉬지 않고 혼잣말로 입을 재게 놀리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6인실의 여섯 환자 가운데 유일하게 시끄러운 주만수가 간혹 입을 닫는 날이 오면 103호는 절간처럼 고요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마셨는데…, 감히 나를 알코올중독자로 몰아!”
주만수가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혼잣말 모드에 돌입하겠다는 신호였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였던 주만수는 절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만수도 그럴 때에야 비로소 술을 마시는 부류였다.
“아니, 회식 때 교장선생님이 술을 권하는데 평교사인 내가 당돌하게 술 안마십니다, 이렇게 거부할 수 있냐고. 그건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암.”
주만수의 혼잣말은 계속 이어졌다.
“회식 끝나면 또 바로 집에 들어갈 수 있냐고. 교감선생님이 입가심으로 호프 한잔하고 가자는데 안 됩니다, 난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똑바로 집에 들어갈랍니다, 이렇게 할 수 있냐고. 그건 아랫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암.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그냥 빈손으로 들어갈 수 있냐고. 캔맥주라도 하나 사가서 자기 전에 한잔해야지.”
면벽좌선의 기본자세를 유지한 채 주만수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남편이 한잔하고 왔다고, 망할 여편네가 어디다 대고 감히 딱딱거려. 김 선생한테 비하면 나는 술 마시는 것도 아냐. 내가 술 안 마시려 해도 너 때문에 마신다, 너 때문에 마셔. 너만 아니면 내가 술 마실 이유가 없어.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유위유망(有爲有望)한 나를 알코올중독자로 몰아서 정신병원에 처넣어!”
주만수가 모노드라마를 공연하는 배우처럼 격정적으로 소리 질렀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