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홍종선의 명대사㉚] 다시 곱씹어 보는 ‘헤어질 결심’ ①슬픔의 방식…에 이어서.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송서래(탕웨이 분)가 장해준(박해일 분)에게 한 말이다.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통화로, 이 말만큼은 진정을 다 해 얘기하고 싶어 중국어로 말한 대목이다. 시점이 기막히다. 초록색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거센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자신을 해준의 미해결 사건으로 남기게 할 ‘선택’을 실행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시다. 자꾸 되뇌어지는, 완벽한 대구의 문장이다. 시를 들어놓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해준이 서래를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해준의 사랑이 끝난 순간, 서래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은 언제일까.
해준: 사진 태우고, 내가 녹음한 파일 다 지우고……그것도 참 쉬웠겠네요? 좋아하는 ‘느낌만 좀’ 내면 내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까?
다시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행복’을 언급해 놓고는 더 화가 나)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완전히 붕괴됐어요.
혼자 내린 결론. 서래는 해준이 분노를 터뜨린 순간, 해준이 ‘붕괴’를 말하고 떠나간 순간을 자신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잠복근무를 빌미로 믿음직한 남자가 자신의 밤을 지켜주고, 단일하게 할 줄 아는 중국 음식을 자신이 뒤에서 담배를 태우는데도 불평 없이 만들어 주고, 살인의 증거들을 없애는 걸 결과적으로 도와주었던 일들을 해준의 사랑이라고 서래는 생각했구나. 해준이 떠나고서야 서래는 해준을 진정 사랑하게 됐구나.
한 가지 드는 의문점. 정말 서래는 그때부터 해준을 사랑했을까. 이전까지의 모든 행동은 단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준을 ‘좋아하는 척’했던 연기였을까. 해준 앞에서 치마를 풀썩 들어 상처를 보여 주고, 해준의 범인 추격 장면을 미행하듯 좇던 일들은 그래, 어떻게든 그렇다 치자. 그러나 어찌해도 동의할 수 없는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먼저. 서래가 먹이를 주는 길고양이가 밥그릇 옆에 죽은 까마귀를 갖다 두었다. 아파트 주민 아줌마가 불평한다. 서래가 자꾸 먹을 걸 주니까 고양이가 뭘 잡아다 놓는다고. 까마귀 사체를 발견한 서래는 한숨 속에 까마귀를 묻는다. 놀이터 모래밭을 깊이 파 까마귀를 조심스레 누이고 모래를 밀어 메운다. 장차 해변에 ‘슬픔의 구덩이’를 팔 초록색 플라스틱 양동이가 이때 먼저 쓰인다.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서래 다리에 몸을 부비자 서래가 중국어로 말한다. 서래의 말을 한켠에서 몰래 휴대전화에 녹음한 해준이 집에 돌아와 번역기를 돌려본다.
“당신(고양이)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뭐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또 하나의 장면. 시간이 흘러. 잠 못 자는 해준을 그의 방에서 서래가 재운다.
서래: 눈 감아요.
해준: (눈 감았다가 이내 다시 뜨더니) 정말 내 심장이 갖고 싶어요? 그걸로 뭐 하게요?
무슨 소리인가 잠깐 생각하다 깨닫고 웃는 서래.
서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아니라. (방긋 웃는 해준의 눈을 손으로 감겨 주며)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친절한 해준의 마음을 갖고 싶어 하는 서래의 마음, 전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좀’ 갖고 싶은 마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해준의 의식을 한 마리 해파리로 만들어 깊은 바다로 보내 잠들게 하고 싶은 마음, 건전지처럼 내 잠을 빼 주고 싶을 만큼 해준의 숙면을 바라는 서래의 마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처음엔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거친 손처럼 거친 인생을 더욱 거칠게 만드는 남자들을 만나면서 서래의 해준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더욱 커갔을 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사랑을 서래는 이포에서 재회한 해준에게는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1
해준: 진짜 이 동네에 왜 왔어요?
서래: 왜 자꾸 물어요?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그게 중요해요, 당신한테? (서래가 듣고 싶은 답을 주고 싶지 않은 해준, 쓱 들어와 돌아다닌다. 서래, 졸졸 따라다니며) 그게 왜 중요한데요? (아무리 따라다녀도 답해 주지 않자) 당신 만날 방법이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2
서래: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바람직한’ 대목에서 어처구니없어 픽 웃을 수밖에 없는 해준).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3
서래: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다른 주머니에서 브레스민트 통을 꺼내는 서래. 무슨 물건이 어느 주머니에 들었는지 다 안다. 한 알 입에 머금고 해준에게 키스. 꼭 끌어안는 해준. 긴 키스 끝에 갑자기 입술을 떼는 서래.
서래: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이보다 지독하고 처절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다른 남자(해준)와 ‘헤어질 결심’으로 임호신(박용우 분) 같은 사기꾼과 결혼했지만 잊을 수 없고, 결심뿐 마음으로 헤어져지지 않은 서래. 재혼한 남자와 해준 부부가 사는 이포로 와서, 오가다 얼굴이라도 보고팠던 서래. 헤어질 수 없는 연인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다 호신에게 들키고, 이를 빌미로 호신이 형사 해준과 아내 정안(이정현 분)을 협박하려 하자 해준의 ‘자부심’을 지켜주기 위해 위험한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서래.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기보다 기꺼이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어 잊히지 않는 길을 택하는 사랑.
다시 살인 사건 피의자가 되었건만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게 된 것을 기쁨으로 느끼는 이 바보 같은 사랑은 짝사랑이었을까. 진정 해준의 사랑은 ‘붕괴’를 말하던 그 순간에 끝났을까. 그렇다면 서래의 마지막 선택은 고양이의 제물이 된 까마귀보다 안쓰럽다. 그러나….
서래: 날 떠난 다음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살아있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경직되는 해준)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해준을 보는 간절한 서래의 눈빛) 그날 밥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다시 사는 것 같았죠? (서래, 해준의 뺨에 손을 댄다)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부드럽지요?
해준: 지난 사백이 일 동안 당신을……. (갑자기 중단, 심호흡 몇 번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그렇다고 해서, 난 경찰이고 당신이 피의자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필사적 의지로 서래의 손을 제 얼굴에서 떼어낸다) 피의자, 알죠? 경찰한테 의심받는 사람.
(중략)
해준: 내가 서래 씨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죠? 아니, 안 궁금하댔나? 그래도 말하겠습니다.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 씨에 관해 많은 걸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대하는 너의 손길과 마음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고작 형사를 속여 살인 피의자를 모면하려는 거짓 연기였다고 생각해 ‘나는 붕괴됐다’고 분노하며 서래를 떠나온 이후의 날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402일 동안 세 온 해준의 마음, 툴툴거리면서도 서래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는 해준의 뒤늦은 용기, 사랑이다.
둘의 사랑이 언제 시작됐건 시작된 건 틀림없고,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는 사랑이다. 임호신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해준이 형사로서의 자부심을 되찾고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게 서래의 사랑이었지만, 서래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자신을 위해 벌인 인일줄 알게 된 만큼 아니 이제 다시는 서래를 볼 수 없게 된 만큼 ‘붕괴 이후’보다 더 처참해질 테지만 잊을 수 없는 게 해준의 사랑이다.
어른들을 위한 멜로, 영화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배급 CJENM)이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잊힐 리 없는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