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 사례 237건…종료 67건
"시범운영 한계…투자도 안돼"
금융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두고 현장에서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아이들이 모래놀이터에서 안전하게 뛰놀 수 있듯 금융사들이 마음껏 혁신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겠다 공언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커져만 가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금융당국이 초심을 잃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표류하는 혁신금융의 현 주소를 톺아봤다.<편집자주>
금융권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어느덧 4년 가까이 운영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 법령 정비로 이어진 사례는 10여건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시범 운영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서비스들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가운데, 법령 정비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혁신금융서비스로 인해 개선된 법령과 만들어진 규정 등은 총 14건뿐이다. 혁신금융서비스란 새로운 금융서비스가 기존 규제로 실현되기 어려울 경우 한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해주는 제도다. 시범 운영 이후 당국이 서비스의 혁신성과 안전성을 인정하면 관련 법령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혁신금융서비스 타이틀을 얻은 사례가 230여건에 이르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를 통해 법적으로 제도가 자리 잡은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2019년부터 지난달까지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사례는 237건에 이른다. 이중 시범 운영 기간(2년)이 만료된 서비스는 67건, 한차례 연장(2년)된 사례까지 포함해 지난달 기준 시범 운영 중인 서비스는 170건이다.
그나마 법적 장치가 마련된 사례를 최근 순으로 보면, 우선 지난해 12월 은행이 주택담보가치 산정시 50세대 미만 아파트에 대해 자체 평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도록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이 개정됐다. 이로 인해 빅데이터 기반 부동산 시세 자동평가 서비스를 지속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기술보증기금법이 개정돼 업무에 '매출채권팩토링'을 추가해 중소기업들로부터 상환청구권 없는 매출채권 팩토링 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됐다. 상업어음, 외상매출증서 등 매출채권을 매입해 이를 바탕으로 자금을 빌려줄 수 있게 된 것으로 시행일은 내년 4월이다. 신용보증기금도 혁신금융서비스로 매출채권팩토링 업무를 진행하다가 이보다 앞선 2021년 12월 관련 법이 개정됐다.
스마트폰을 소상공인 카드결제 단말기로 사용할 수 있게 여신금융협회 '신용카드 회원의 정보보호를 위한 단말기 시험 가이드'가 2021년 12월에는 개정된 것도 규제 개선의 대표적 사례다. 이전에는 소상공인이 포스기, 카드단말기 등 별도 하드웨어 장치가 있어야만 결제가 가능했는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도 카드 결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출 비교·추천 플랫폼도 근거 법령이 신설되면서 지속할 수 있게 됐다. 온라인을 통한 대출상품중개업 도입과 온라인 대출모집인의 1사 전속주의 예외를 허용한 '금융소비자법'이 2020년 3월 제정되면서다.
이밖에 ▲증권사 등이 온라인쇼핑 플랫폼을 통한 금융투자상품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유권해석(지난해 7월) ▲항공사 등 다양한 경로로 환전이 가능하게 한 '외국환거래규정' 개정(2020년 10월) ▲핀테크 기업도 해외송금 중개가 가능하게 한 '외국환거래규정' 개정(2020년 10월) ▲키오스크를 통해 소액해외송금을 가능하게 한 '외국환거래규정' 개정 ▲지역사랑 플랫폼의 법적 근거를 만든 지역사랑상품권 제정(2020년 5월) ▲보험상품 자문이 가능한 '금융상품자문업자' 도입이 핵심인 금융소비자법 제정(2020년 3월) ▲예·적금 비교 서비스를 위해 개인신용정보 전송 요구권을 도입한 '신용정보법' 개정(2020년 2월) ▲가명정보를 결합·분석할 수 있게 근거를 만든 '신용정보법' (2020년 2월) ▲개인사업자 등 신용조회업 허가 대상을 확대한 '신용정보법' 개정(2020년 2월) 등이다.
하지만 혁신금융서비스 지정 규모를 고려하면 규제 개선 속도가너무 더디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규제가 개선되지 못하면 아무리 획기적인 핀테크 서비스라도 운영을 종료해야 하고,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간일지라도 시범 운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핀테크 업계 관계자는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됐더라도 이 기간은 오히려 '시범 운영 기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불안정한 상황"이라며 "어떤 투자자가 언제 중단될지도 모르는 서비스에 투자를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물론 금융위도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을 통해 운영 기간 동안 관련 규제가 개선되지 못한 서비스들 중 심사를 거쳐 1년6개월(6개월+6개월+6개월)까지 또 특례를 연장해준다. 다만 대형 로펌 자문을 받을 수 있는 기존 금융사나 금융기관과 달리, 규제 개선 리스크를 혼자 부담해야 하는 중소형 핀테크 서비스들일수록 규제 개선 문턱이 높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다른 핀테크 업계 관계자는 "금융위 인원이 제한돼 있으므로 규제 관련 리스크가 적고 소비자 호응이 좋은 서비스를 우선순위로 법령 정비를 검토하게 된다"며 "법 개정 리스크나 요구사항을 전문가를 통해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는 대기업일수록 규제 개선 가능성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