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미, 데뷔 40년만에 첫 주연…국제영화제 2관왕
영화 '그대 어이가리'에서 윤정희를 보았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보았을 당시에도 그리 느꼈는데, 지난달 언론시사에서는 감회가 더욱 진하게 왔다. 영화를 크게 파악하는 첫 관람 때보다 작품의 면면들이 세세히 들어온 까닭, 그 사이 배우 윤정희 님이 타계한 영향도 있다.
이제는 작품으로만 남은 배우 윤정희를 생생하게 불러일으킨 이는 배우 정아미다. 정아미는 세계 각종 영화제에서 51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영화 '그대 어이가리'(감독 이창열, 제작·배급 ㈜영화사 순수)에서 여자 주인공 노연희를 연기했다.
연희는 젊은 시절 한국무용을 했고, 평생 꽃처럼 어여삐 살다가고 싶었던 여인이다. 소리하고 북치는 명인인 남편 윤동혁(배우 선동혁 분)과도 그림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곱디고운 자신을 두고 예술적 방황을 인생의 외도로 드러낸 남편에게 상처받은 탓일까. 연희는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
남자의 후회는 때가 늦는 터, 동혁은 대학 교수직이며 해외순회공연을 모두 내려놓고 연희의 간병에 힘쓴다. 하지만 연희의 병세는 점점 악화돼 가고, 이제 처음 누군가를 살피는 남편은 물론이고 딸 부부도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배우 정아미는 노연희의 알츠하이머를 연기하기 위해 요양원을 찾아 실제로 투병 중인 분들과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나 차담을 나누며 전한 이야기다.
그간 많은 배우가 치매를 연기해 왔지만,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 표현해 그 차별성의 비결이 궁금해 묻자 배우 정아미가 들려준 얘기다.
"관찰했다면 실례고요, 그냥 그 공간에 있으면서 얘기도 나누고 그랬다는 게 맞아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때와 상황에 따라 순조로이 얘기를 나눌 수 있기도 하더라고요. 금세 악화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고운 모습을 보았어요. 그걸 그대로 표현해야겠다 한 거죠, 너무 끔찍하고 추하게만 그리는 건 아니라는 걸 실제로 뵙고 느꼈어요."
"데뷔 40년만의 첫 주연이에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한 것도 있지만, 누군가의 가족이고 바로 얼마 전까지는 아름다웠던 분들이잖아요. 그런 것들에 누가 되지 않게 표현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대단하시다' 경의를 표하자 정아미는 손사래를 쳤다. "모든 배우가 그래요 작은 역이어도 성실히 준비하고요. 당연한 제 임무인 걸요"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꼈다.
배우 정아미는 영화 '그대 어이가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정신줄이 잠시 끊어졌을 때든 마지막 순간에든 아름답다. 이 배우가 이토록 아름다웠나, 이토록 연기를 잘했나, 40년을 못 알아본 자책감에 부끄러울 정도다.
세상 사람의 눈은 같은 법이어서 배우 정아미는 노연희 연기를 통해 제11회 리치몬드국제영화제, 재42회 파이브콘티넨트국제영화제가 주는 트로피로 박수받았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배우 정아미, 정아미가 빚은 노연희에게서 윤정희가 겹친다.
첫째는 외모다. 영화를 보면 실감하겠지만, 이목구비며 아우라가 영화 '시'(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 필름ㆍ유니코리아문예투자, 배급 ㈜NEW)에서 자신의 본명을 딴 손미자를 연기한 배우 윤정희와 흡사하고 어떤 장면들에선 젊은 시절의 윤정희가 지녔던 아름다움이 연상된다.
둘째는 기막힌 운명이다. 캐릭터 손미자도 사람 손미자(윤정희)도 알츠하이머를 앓았다. 노연희도 알츠하이머로 고통받았고, 스스로 '원한 적 없는 모습'을 멈추고 아름다울 때 떠나고 싶어 했다. 어쩐지, 이보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 떠난 노연희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에는 손미자도 배우 윤정희도 아름답게 자리할 듯하다. 배우 정아미가 해냈다.
인생이라는 게, 특히나 배우의 인생이라는 게 참 묘하다. 배우 윤정희는 데뷔작 '청춘극장'부터 주연이었고, 배우 정아미는 40년이 흐르고서야 첫 주연작 '그대 어이가리'를 만났다. 하지만 두 배우의 연기내공이나 아름다움은 막상막하다. 누구에게 먼저 스포트라이트가 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지난 2월 언론시사 후 간담회, 주연으로서 처음 마주한 기자들 앞에서 첫인사를 건네다 울컥하는 정아미의 목소리와 눈가에 반짝이는 물빛을 보았다. 마치 행운이 일찍 주어지지 않는 평범한 우리가 이룬 성취인 것만 같아 함께 기뻤다.
세월이 흐른 뒤 역사는 윤정희, 정아미 두 선후배를 모두 아름다운 배우로 기억할 것이다. 차곡차곡 다져진 내공의 배우 정아미가 그리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