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적어도 3가지 지속적 괴롭힘이 등장한다. 윤소희와 문동은, 김경란이 바통 터치하듯 연이어 박연진-전재준-이사라 무리와 그 수하 손명오-최혜정에게 당했던 ‘학교 폭력’. 강현남이 남편 이석재에게 당했던, 현남이 없으면 딸 선아가 대타로 아버지에게 당했던 ‘가정폭력’. 주여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소시오패스 강영천에게 당했던 정신적 ‘스토킹 폭력’.
드라마는 문동은에게 가해진 집단 괴롭힘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학교 폭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칠 수 있음을 강변하고, 피해자인 문동은이 숨거나 움츠리지 않고 18년에 걸쳐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세워 가해자들의 인생을 흔들고 사회적 처벌받게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기본 줄거리는 학교 폭력을 따라가지만, 염혜란(피해자 강현남 역)과 이무생(가해자 강영천 역)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 덕에 ‘메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가정폭력과 스토킹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강현남은 드라마 초반 문동은(송혜교 분)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다. 현남이 동은의 복수를 돕는 대신, 동은은 가정폭력 가해자 이석재(류성현 분)를 없애 주겠다는 거래다.
가정폭력에 대한 해결 조치의 1단계는 ‘분리’이다. 독학으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만큼, 과외로 복수의 기반이 될 자금을 확보할 만큼 ‘사교육’에 도가 튼 동은은 선아(최수인 분)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가르치며 유학의 학력 기반을 다져 준다. 새로 입학할 미국 학교와 홈스테이 가정을 마련하고 유학자금을 댄 것도 물론 동은이다. 가해자와의 물리적 분리, 가해자로부터의 도피를 동은이 이뤄낸 것이다.
선아: 도망치게 해주셔서, 인생 바꿀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동은: 도망이 아니라 희망이야.
선아: 저도 샘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이 될게요.
선아는 엄마를 무자비하게 패고, 자신도 막무가내로 때리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도 어서 아버지로부터 먼 곳으로, 자신에게로 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고 혼자 ‘도망’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있을 수 있다. 동은은 이 부분까지 내다보고 “도망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분명히 하며, 선아의 심적 부채감을 덜어준다.
‘더 글로리’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박연진(임지연 분)을 주축으로 한 학교 폭력으로 지옥에 빠진, 가해자들을 자신의 지옥으로 초대하려는 동은은 ‘지옥’의 반대말로 ‘희망’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날 이모님(현남)은 처음으로 봤대.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망이 생긴 낯선 자신의 얼굴을….”
“기억나? 연진아. 언젠가 네가 (날씨 방송에서) 조심하라던 너울 말이야. 너울이 무서운 이유는 정확한 예보법이 개발되지 않아 예측이 어렵고 잔물결도 없이 잠잠하다가 일순간에 모든 걸 삼켜버리기 때문이라고. 우리 중 누구의 희망이 너울이 될까? 연진아.”
동은은 자신을 지옥에 빠트린 가해자들을 바로 그 지옥을 불러들여 ‘당신들도 나처럼 뜨거웠기를, 쓰리고 아팠기를’ 희망한다. 현남이 처음으로 발견한 희망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선아의 폭력 가정에서의 분리가 도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기를 희망한다.
너울,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시청자는 희망한다. 연진, 재준(박성훈 분), 사라(김히어라 분), 혜정(차주영 분), 명오(김건우 분)의 탐욕이 아니라 동은의 희망이 너울이 되기를. 가해자 석재가 아니라 피해자 현남과 선아의 희망이 너울이 되기를. 살인마 강영천이 아니라 그에게 아버지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심리적 자상을 끝없이 당한 주여정(이도현 분)의 희망이 너울이 되기를.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가. 지옥에서 벗어나는 희망이 아니라, ‘희망의 세상’, 희망 그 자체를 만드는 희망을 희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