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LED, 원천기술 갖고도 투자시점 놓쳐 퇴출
삼성, 공격적 투자로 OLED 시장 주도권 확보 나서
“일본이 씨를 뿌리면 한국이 추수하고 중국이 이삭을 줍는다.”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LCD(액정표시장치) 산업의 흥망사를 표현한 말이다.
삼성디스플레이가 4일 발표한 4조1000억원 규모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설비 투자계획은 앞으로 또 다시 한중일 삼국지가 펼쳐질 OLED 시장에서도 이같은 역사를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LCD 회초 상용화한 일본, 투자 실기로 한국에 주도권 내줘
디스플레이 시장에서의 한중일 삼국지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불뚝이’ 브라운관을 대체할 획기적인 기술인 LCD를 가장 먼저 상용화한 나라는 일본으로, 1983년 세이코엡손이 첫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브라운관 산업에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초기 LCD 시장을 주도했다.
우리 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든 것은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1995년 삼성과 LG가 LCD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후 1999년 하반기부터는 대만 업체들도 진출하면서 한중일 3국지가 본격화됐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당시 차세대 분야인 5세대 LCD 투자를 머뭇거린 대가로 시장 주도권을 잃게 됐다. 그 사이 한국은 2001년 당시 가장 앞선 기술인 5세대 LCD에 대한 과감하고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한국은 과감한 투자로 2004년 처음으로 일본을 뛰어 넘고 세계 LCD 시장 1위 자리에 올라섰다. 이후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6세대, 7세대, 8세대 LCD, OLED에 대한 투자 확대로 2004년부터 2020년까지 17년간 세계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다시 바뀌고 있다. 이제 한국의 뒤를 중국이 무섭게 쫓고 있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2021년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 41.5%로 세계 1위 국가로 등극했다. 특히 LCD는 세계 시장의 절반을 점유했다.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총 투자비의 10% 자금만 보유하고 있어도 공장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1위 디스플레이 기업인 BOE는 2018년 10.5세대 LCD B9 공장의 총 투자비 56억 달러 중 10%인 5억6000만 달러만 가지고도 세계 최대 LCD 공장을 세웠다.
중국 기업들의 잇따른 시장 진입 이후 삼성디스플레이는 LCD 치킨게임으로 약화된 대형 사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22년 LCD 생산을 중단하고 자발광 기술인 QD-OLED로 기술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지난해 12월 TV용 LCD 패널 국내 생산을 종료한다고 밝힌 바 있다.
OLED 원천기술 갖고도 뒤쳐진 일본…뒤늦게 투자했지만 좌절
프리미엄 기술인 OLED 분야도 LCD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한국이 세계 시장 71%(지난해 기준, 중국 28%)를 점유하며 압도적인 1위에 올라 있지만, 시장이 개화하기 전 원천 기술 확보 경쟁에서 앞선 것은 일본이었다.
소니, 엡손, 산요 등 여러 일본 업체들이 일찌감치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OLED’를 지목하고 원천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기술 장벽과 투자비용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양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삼성이 2007년 10월10일 천안사업장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9월부터 천안의 A1라인에서 세계 최초로 OLED를 양산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한 발 앞서나간 것이다.
한국·중국에 뒤쳐진 OLED 경쟁력을 단숨에 뒤집고자 2015년 일본은 소니, 파나소닉, 재팬디스플레이(JDI) 등 일본 기업과 민관공통투자펀드(INCJ)가 합작해 OLED 전문기업 ‘JOLED’를 설립했다.
JOLED는 한국 업체들의 기술보다 효율 면에서 뛰어난 ‘잉크젯프린팅’기술을 앞세워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일본 유일의 OLED 생산업체이자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불렸던 JOLED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다. 지난달 27일 도쿄지방법원에 회생 절차를 신청한 것이다.
JOLED는 삼성과 LG가 유기물을 증착해 OLED 패널을 제조하는 방식과 달리 잉크젯 프린팅 방식을 시도했다. 잉크젯 프린팅 방식은 일반적인 제조 방식으로는 생산 속도가 빠르고, 재료 사용량도 적어 효율적인 기술이지만, JOLED는 기술 완성도와 품질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적자난에 시달렸다.
JOLED의 파산 신청은 디스플레이 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문가들은 JOLED의 실패 원인에 대해 ‘일본 디스플레이 업계가 기술 및 경영전략에서 모두 실기한 결과’라는 평가를 내린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JOLED의 파산은 쇠락한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의 현주소를 그대로 대변한다고 꼬집었다. 일본이 LCD 산업에서 삼성·LG디스플레이에 압도당한 뒤 번번이 투자시기를 놓쳐왔고 2015년 이후 중소형 OLED 투자 국면에서도 조단위 투자금을 감당하지 못해 제대로 양산 라인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LCD 시장의 최강자였던 일본은 JOLED의 파산으로 회생의 기회를 또 잃었다. 기술과 가격 경쟁력에서 한국과 중국에 뒤처지면서 투자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OLED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의 2021년 시장 점유율은 1.9%로 사실상 시장 퇴출 수순이다.
'선제 투자만이 살 길' 깨달은 삼성, IT용 OLED 공격적 투자
글로벌 IT 기업들이 잇따라 투자 계획을 철회하는 상황에서 삼성디스플레이가 공격적 투자에 나선 것은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의 패착을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주도권 이동이 빠른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선제적 투자가 절실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일본은 대형 LCD 라인 투자 시기를 놓치면서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의 호황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초기 OLED 상용화 과정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포기하면서,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도 OLED 산업에서 경쟁력을 상실했다.
최근 JOLED의 파산 신청은 이미 경쟁력을 잃은 상태에서 회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다른 산업과 비교해 디스플레이 산업의 주도권 변화는 훨씬 역동적이어서 초기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과 대만으로 넘어갔던 주도권이 가까운 미래에 중국으로 이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디스플레이의 이번 8.6세대 IT용 OLED 투자는 다자경쟁에서 양강구도로 변화하면서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경쟁구도에서 선제적 투자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지키기 위한 초강수”라고 분석했다.
삼성은 디스플레이 사업 초기부터 과감한 투자로 사업의 승기를 잡아왔다.
40인치 대형 LCD TV 시장이 열릴 것으로 확신했던 삼성은 2003년 8월 경쟁사와 달리 6세대를 건너뛰고 바로 7세대 LCD 투자를 결정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 결과 전체 LCD 시장과 달리 고전하던 TV용 LCD 시장에서 2005년 20%를 기록하며 샤프(18%)를 제치고 2위에 올랐다. 2008년에는 LG를 꺾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005년 11월 수요처도 없는 상황에서 4700억원을 투자해 1만3800평 규모의 OLED 전용라인, A1(4.5세대) 라인 건설에 나섰던 삼성은 이후 2007년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며 세계 최초로 OLED 양산에 성공해 OLED 산업화를 주도했다.
이후 삼성디스플에이는 10조원이 넘은 천문학적인 투자비를 들여 6세대 플렉시블 OLED 라인 ‘A3’를 구축해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생산량을 큰 폭으로 확대하며 스마트폰의 기준을 ‘LCD’에서 ‘OLED’로 바꿔놨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이제 8.6세대 IT용 OLED 투자를 통해 LCD가 장악하고 있는 태블릿, 노트북 시장의 중심 기술을 OLED로 빠르게 전환,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OLED 기술로 중국으로 넘어간 한국 디스플레이의 영토를 탈환할 전략이다.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신규 라인이 완성되는 2026년이면 IT용 OLED를 연간 1000만대 정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IT용 매출이 전체 매출의 약 20% 수준으로, 현재 대비 5배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