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대통령, 美 국빈 방문 당시
의회 연설서 장진호 전투 언급
미군, 1만2000여 사상자 발생
중공 9병단 이탈시켜 적화 저지
한미동맹이 70주년을 맞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국빈 방문 당시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6·25전쟁 장진호 전투를 소환했다.
윤 대통령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국민'을 지키기 위한 미군 희생에 경의를 표했고, 미 의원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56차례의 박수 가운데 가장 큰 박수는 이때 터져 나왔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가 한미 혈맹의 '상징'으로 거듭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또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간 이어졌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미 제1해병사단 1만5000명은 중공군 7개 사단 12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함경남도 함흥(흥남)으로 철수했다. 전투 과정에서 미 육군 7사단 2개 대대, 영국 해병 제41코만도부대, 미군에 배속된 국군 카투사 장병 및 경찰 화랑부대원 등도 참여했다.
수적 열세를 감내한 이들의 사투 덕에 10만명이 넘는 피난민이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무사히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
장진호 전투를 현장에서 이끌었던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의 발언은 당시 전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준다.
장진호 일대는 해발 1000~2000m의 개마고원 고산 지대로, 당시 한겨울을 맞아 영하 30도의 혹한까지 덮쳤다. 미군은 낯선 지형과 추위에 시달리는 가운데 10배나 많은 중공군 포위망까지 뚫어야 했다. 당시 중공군은 미 지상군 가운데 최정예 사단 중 하나로 꼽히는 해병1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9병단 소속 사단들을 대거 투입한 상황이었다.
서쪽 방향으로 진군하기 위해 함경남도 유담리(柳譚里)까지 진출해 있던 해병1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중공군의 포위를 인지한 것은 11월 27일께였다. 두 연대는 방어에 집중하던 중 유엔군사령부의 철수 명령(30일)을 받고, 12월 1일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下碣隅里)로 철수 및 합류하기로 했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는 22㎞. 두 연대는 77시간의 사투 끝에 12월 4일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포위 상황을 감안해 "모든 전투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중 철수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스미스 사단장은 거부했다. 공중 철수를 위해선 2개 대대 병력이 수송기 이륙을 돕기 위해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중공군을 막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미스 사단장은 '불명예' 대신 "새로운 방향의 공격"을 택했다. 12월 6일부터 시작된 작전은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황초령을 거쳐 흥남항이 있는 함흥까지 6일간 이어졌다. 110㎞에 달하는 철수 작전은 12월 11일 23시경 마무리됐다. 미 해병1사단이 보름 넘게 사투를 벌인 덕에 한미는 흥남항에서 대규모 해상 철수 작전에 나설 시간까지 벌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4500여명이 전사하고 75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미군을 뒤로 물리는 대가로 5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9병단은 전투 기능 상실해 3개월가량 재정비에 나서야 했다.
관련 여파로 9병단은 12월 31일부터 이듬해(1951년) 1월 4일까지 이어진 중공군 제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당시 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한 뒤, 수원까지 밀고 내려오며 적화통일을 위협했다.
만약 9병단이 힘을 보탰을 경우 수원에서 멈췄던 '1·4 후퇴'는 대전 이남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관측이다.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 주요 부대에 기능 부전을 안긴 덕에 6·25 전쟁도 끝내 승리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