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액 1년 새 4000억↑
채무자 다각적 지원 필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 오히려 위험을 간과할 수 있다는 비유의 회색코뿔소. 미셸 부커 세계정책연구소장이 2013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소개한 이 개념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금융시장에 경종을 울리는 단어로 대두되고 있다. 수년 전 잠깐의 제로금리 시대 동안 급격히 덩치를 키운 천문학적 빚은 최근 높아진 이자율을 맞닥뜨리자 그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끝내 균열이 일기 시작한 빚 연체의 현주소와 그 속에 담긴 저마다의 속사정을 톺아본다. <편집자주>
국내 카드사에서 발생한 연체가 1년 새 4000억원 가까이 불어나면서 1조6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서민 경제의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카드 값 연체까지 몸집을 불리면서 위기감이 더욱 증폭되는 형국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 이후 3년여 만에 완전한 일상회복이 이뤄지면서 소비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올해도 경기 침체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관측에 카드업계를 둘러싼 먹구름도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신한·KB국민·삼성·현대·롯데·우리·하나·BC카드 등 8개 카드사에서 발생한 연체는 지난해 말 기준 총 1조6089억원으로 전년 말보다 31.7%(3872억원) 급증했다.
카드사별로 보면 신한카드에서의 연체액이 4128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국민카드 2483억원 ▲삼성카드 2440억원 ▲롯데카드 1999억원 ▲현대카드 1895억원 ▲우리카드 1782억원 ▲하나카드 1084억원 ▲BC카드 269억원 순이었다.
이에 따른 카드업계의 평균 연체율은 0.99%를 기록했다. 우리카드의 연체율이 1.20%로 가장 높았으며, 이어 ▲롯데카드 1.08% ▲신한카드 1.04% ▲하나카드 0.98% ▲국민카드 0.92% ▲삼성카드 0.90% ▲현대·BC카드 0.87% 등을 기록했다.
카드사들의 연체율 상승 배경에는 지난해 기준금리 인상 행렬이 지속되면서 급전이 필요한 취약차주들이 대거 몰린 영향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소비가 회복됐지만 경기 악화로 이를 상쇄할 여력이 없다는 진단도 나온다.
각종 카드대금과 할부, 대출, 리볼빙 등의 카드 서비스 연체율도 치솟으며 3~4년 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올해 3월 기준 카드사들의 카드론 잔액은 34조1210억원을 기록했다. 2019년 29조원대였던 카드론 잔액은 2020년 32조원, 2021년과 지난해 33조원대로 껑충 뛰었다.
지난 4월 리볼빙 잔액 또한 7조1729억원으로 1년 새 1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리볼빙은 일시불로 물건을 구매 시 카드 대금의 일부만 먼저 결제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상환하는 서비스로, 결제대금 중 일부를 연체 없이 상환 연장할 수 있지만 이자가 법정 최고금리인 연 20%에 가까워 이용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카드사들의 연체율은 금융권 전체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카드론을 받는 고객의 특성 상 다중 채무자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금융권 전반적으로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신용카드 관련 부채는 주택담보대출 등과 달리 대부분 생활비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해 카드 연체를 예방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이 마련되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수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용카드 부채 문제가 장기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부채 장기화에 따른 비용, 위험 등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사후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장기 카드 연체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질병 및 실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갑작스러운 소득 감소를 상쇄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