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뮤지컬 번역기 김수빈 인터뷰
‘시카고’ ‘마틸다’ ‘원스’ ‘킹키부츠’ ‘스위니토드’ 등 번역
하나의 캐릭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의상과 분장, 음악, 조명 그리고 캐릭터에 맞는 대사톤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 공연이 오리지널 내한이라면 ‘자막 번역’도 그 여러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단순히 원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것을 넘어 극의 상황과 캐릭터의 특성에 맞는 번역과 자막의 ‘말맛’이 중요한 이유다.
조연출로 뮤지컬계에 발을 들였다가 2013년 ‘애비뉴Q’의 내한 공연 당시 통통 튀는 자막 번역으로 주목받은 김수빈 번역가는 코믹한 장르의 작품을 번역할 때 유독 돋보인다. 2017년에는 예그린어워드에서 ‘스위니토드’(2016)로 각색‧번안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작품에서 “신혼부부 파이를 먹어라. 신혼부부가 왜 이렇게 안 달달하냐? 꿀을 칠까? 아니, 기름을 치자. 무슨 기름? 아이 러브 유!” 같은 재치 넘치는 대사로 큰 인상을 남겼다.
“원어로 봤을 때 사람들이 웃은 부분은, 한국어로 공연하거나, 내한 공연에서도 웃을 수 있도록 하는 걸 좋아해요. 시각적으로 도움을 주는 역할이에요. 즉 무대 위에서 내뱉는 배우의 대사만 듣고 순간에 웃지 못하는 부분,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자막 번역을 통해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죠.”
최근 공연된 내한 작품들 중 가장 작품의 특성과 잘 어우러지는 자막 번역으로 주목받은 ‘시카고’의 자막 역시 그의 손에서 탄생 됐다. 지난 내한 당시 시도했던, 캐릭터마다 다른 폰트의 자막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일부 번역을 수정해 다시 선보이게 됐다.
“‘시카고’는 그동안 했던 작품들에 비해 난이도가 조금 높은 작품이었어요. 작품 자체가 너무 세련됐잖아요. 캐릭터들이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풍자하는데 그 위트가 굉장히 세련된 작품인 것 같아요. 그래서 ‘시카고’의 자막 번역도 짧으면서도 세련된 느낌이어야 했어요. 더구나 좋은 작품, 많이 알려진 작품일수록 부담감이 크죠. 많은 관점과 해석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김 번역가의 이런 자막 활용은 TV 예능의 영향이다. 예능을 봤을 때 독특한 자막들이 삽입되면서 시청자들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것을 본 김 번역가는, 뮤지컬에서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애비뉴Q’ 작업에 돌입했다. 당시 제작사는 물론, 관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그에게 새로움을 시도할 원동력이 됐다.
“자막은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김 번역가는 자막 번역에 있어서 소위 ‘낄낄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란 뜻의 줄임말)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그는 “표준어가 아닌 파괴된 한국어를 사용해서라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번 자막기에 시선이 갈 때는 눈으로 맛있게 떠먹고, 어느 순간에는 과감히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짧은 내용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이유죠. 자막을 보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거나 자막에 너무 시선이 오래 머물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 번역가는 배우의 특성, 노래의 특성에 맞는 폰트를 쓰는 것에도 능숙하다. ‘시카고’의 대표 넘버인 ‘올 댓 재즈’의 자막이 한껏 멋을 부린 듯한 서체로, 록시의 넘버는 별 모양 장식으로 꾸며진 서체로, 또 여성 사형수들의 욕설 등은 거칠게 휘갈겨 쓴 서체로 표현한 것이 그 예다. 자막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디자인한 셈인데, 미술을 전공했던 그의 이력이 도움이 됐다.
“사실 저의 집착인 것 같기도 해요(웃음). 1부의 하이라이트인 여섯 명의 여자 죄수들이 부르는 ‘셀블럭 탱고’에서는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캐릭터들이 ‘펑’ ‘여섯’ ‘우드득’ ‘노노’ ‘시세로’ ‘립쉬츠’를 각각 번갈아 부르는데 하나의 폰트로 표현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각자 다른 사연을 말하는 부분에서 각 배우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기호화해서 표현해봤어요. 즉 배우에게 하나의 폰트를 부여하는 거죠.”
그가 만든 자막을 실제 공연에서 자막기에 송출하는 건 자막 오퍼레이터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뮤지컬의 특성상 공연 도중 실수나, 배우의 애드리브 등에 대처하기 위해 자막 번역가와 오퍼레이터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대의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이들의 눈과 귀, 손도 무대 뒤 콘솔에서 빠르게 움직인다.
“제가 만든 자막으로 슬라이드를 넘겨야 하는 적절한 타이밍에 대해 오퍼레이터와 수시로 소통해요. 심지어 배우의 작은 습관들까지 공유하죠. 자막이 빛이 나는 순간은 배우의 연기와 딱 맞아떨어져서 관객들이 웃을 때거든요.”
자막 번역을 단순히 원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금물이다. 내한 공연에서 자막을 ‘미운 오리 새끼’로 표현하는 것도 별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지만, 사실은 공연을 빛내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다. 김 번역가 역시 자막이 내한 공연의 약점이라는 점엔 공감하면서도, 그 약점을 기회로 바꿔내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내한 공연에서 자막은 빼놓을 수 없지만 거추장스러운 요소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흔히 내한 공연의 자막을 ‘미운 오리 새끼’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왕 할 거면 사랑받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길 바라요. 그러기 위해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낄낄빠빠’를 잘해야 하고요. 관객들이 자막을 통해 공연을 이해하고 풍성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하는 것, 비싼 티켓 가격을 주고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들을 기만하지 않는 자막을 만드는 것이 저의 과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