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전, 란' 촬영 중
작품에서 언제나 제 몫을 해내는 박정민은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얼굴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번에도 역시 촌스러움이 가득한 시골의 청년에서 능청스럽지만 그 뒤에 우글거리는 야망으로 점철된 얼굴을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치사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지만, 미워할 수 만은 없는 장도리는 박정민이기에 가능했다.
영화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휘말리는 이야기를 담았다.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올해 여름 극장가 진정한 승자가 됐다. 박정민은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김종수 등 내로라 하는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가감 없이 내뿜는다.
류승완 감독의 오랜 팬이었던 그는, '밀수' 제안이 들어오자 잘 해내보자라는 마음으로 현장을 찾았다. '밀수' 촬영을 끝내고 개봉까지 한 현재는 류승완 감독에게 더 깊은 애정이 생겼다.
"류승완 감독님과는 10년 전 쯤 '신촌좀비만화'라는 단편 프로젝트 '유령'을 함께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이후로 종종 연락을 나누고 찾아뵈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만들어졌어요. 저에게 딱히 '너의 이런 모습을 봤다'라면서 출연 제안을 하신 건 아니었지만 감독님께서 저에게 중요한 역할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특별했어요. 현장에 되게 떨면서 갔어요. 너무 잘하고 싶으면 더 긴장되잖아요. 함께 작업해 보니 류승완 감독님의 더 팬이 될 수 밖에 없었어요. 연기나 영화 뿐만 아니라 제가 배우 생활을 하고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해야 할 사람으로서 시선이나 태도 같은 걸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의지할 수 있는 분으로 마음 속에 자리 잡으셨죠.(웃음) 무엇보다 본인이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로 뛰시는 분이었어요. 그게 감독님의 영화에서 나오는 에너지 원천이지 않을까 싶어요."
장도리는 군천 마을에서 해녀 누나들 사이에서 막내로 제대로 기를 못 피는 인물이다. 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해녀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그 사이 부재한 밀수의 구심점 역할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꿰찬다. 시간이 지난 후 돈 맛을 안 장도리는, 해녀 누나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자신의 배만 불린다. 그럼에도 어딘가 허술한 면과 코믹한 상황으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저는 장도리가 어긋난 선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빠져버린 사람이라고 해석했어요. 그렇게 빌드업을 쌓아갔죠. 현재의 장도리지만, 과거에 가지고 있던 모습을 완전히 버리려고는 안 했죠. 일부러 악역처럼 보여야지 하는 선택들은 안 했어요."
박정민은 '밀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조인성과의 액션 장면이 마음에 들어왔다. 자신이 느꼈던 흥분과 설렘을 관객들에게도 잘 전달해 줘야겠다는 것이 그 신의 목표였다.
"대본에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노래가 나오면서 장도리가 들어온다고 쓰여있는데 흥분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리듬감 있게 연기해야겠다 싶었죠. 흐르는 연기가 아니라, 머리를 털고 들어간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관객들이 그 신을 봤을 때도 심장이 뛰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잘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인성이 형 얼굴은 현장에서도 보면서 믿기지 않았어요.(웃음)"
이번 현장에서 박정민은 현장을 아우르는 김혜수의 인간미와 품격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김혜수 선배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데뷔하신 대선배님이신데 저를 후배라기보단, 한 프레임 안에서 연기하는 동료로 대해 주시는 게 느껴져 좋고 감사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어요. 그 점이 죄송스러웠어요. 하고 싶은데 수줍어서 우물쭈물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주눅이 잘 드는 사람인데 선배님께서 동료처럼 대해주시고 배려도 느껴져 좋았어요."
'밀수' 촬영 현장에서 제작된 '연안 부두' 뮤직비디오는 박정민이 연출했다. 다시 되돌아보니 현장을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돼, 찍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김혜수 선배님께서 '정민이가 한 번 찍어봐'해서 유료 앱 다운 받아서 찍었는데 잘 찍어버렸어요. 하하. 그래서 계속 제가 담당해서 찍었어요. 찍다 보니, 욕심이 나서 촬영이 끝나면 집에 가야 하는데 '잠깐 있어 보세요' 하면서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더라고요. 저는 관찰자 입장으로 찍어서 많이 안 나오는데 재미있었어요."
박정민은 현재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한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을 촬영 중이다. 단편 '일장춘몽', '헤어질 결심'으로 박찬욱과, 이번에는 '밀수'로 류승완과 함께하면서 배우로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감독님들께서 그 어떤 것도 허투루 하시는 게 없으니까 제가 덜렁덜렁 가면 들켜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요하지 않은 신이 없다.' 대사 없이 뒤에 서 있는 장면이어도 저는 어떤 역할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디렉션을 받아요. 현장에 덜렁덜렁 가면 들켜요. 이제 현장에 그냥 슬리퍼 신고 덜렁덜렁 가지 않아요. 예전엔 대사 없으니까 뭐 그러면서 현장 갈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음가짐에 따라 그 신이 바뀌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그 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제가 아예 안 보여요. 그렇지만 준비를 조금이라도 해가면 그 산에서 제가 어떤 역할이든 하고 있어요. '밀수'가 특히 저를 방심하지 않게 만들어줬어요. 박찬욱, 류승완 두 감독님께서 그런 역할을 해주신 거죠."
'파수꾼'으로 시작해 '동주',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등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는 박정민은, 자신의 결과물을 높은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단, 애정을 가지고 아껴주려고 한다.
"가끔씩 내가 무슨 영화를 찍고 어떤 역할을 했나 생각해요. 모두 저를 괴롭히고 마음 고생 많이 시켰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다 소중해요. 남들이 바라보는 저의 필모그래피와 제가 바라보는 느낌은 많이 다를 것 같아요. 누군가는 평가를 하겠지만 저는 아껴주고 싶어요. 스스로 내 필모를 분석하고 평가해서 짓누르는 걸 내가 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요. 욕 먹은 작품이라도 저에게는 소중해요."
박정민은 지난 2018년 에세이 '쓸 만한 인간'을 출간하고, 2022년 왓챠 단편 프로젝트 '언프레임드'의 '반장선거' 연출에 도전했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경험이 자신에게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일의 박정민이 스스로 기대된다는 그다.
"그때 그때 하는 것들이 모두 저에게 하나씩이라도 가르침을 줘요. 무턱대고 다 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건 좋은 것 같아요. 거기서 얻는 재미와 영감, 가르침이 있으니까요. 그렇 것들이 쌓여서 제가 되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