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준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요절한 아들의 시집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으로 한글을 공부하던 정숙(변중희 분)은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필사하던 날, 아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난생 처음 가보는 대학교, 젊은이들 사이에서 정숙은 '김정숙'이라고 쓰인 낡은 시집 하나를 들고 걷기 시작한다.
정숙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벤치 위에 앉아 물을 마신다. 마시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무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옆의 빨간 우체통을 발견한다. 재빨리 시집을 꺼내 '서 있기를 어리석게' 페이지를 연다.
'뜨거운 날에 기대어 붉은 우체통은 울어댄다. 네모난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여. 하얀 벽에 무너지듯 쌓아 올린 그날의 낮은 그리도 뜨거웠나. 쏟아질 듯 위태로운 오지 않을 날, 푸른 잎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말을 왼다'
정숙은 아들이 활동했던 '시와 새들'이라는 동아리방을 찾는다. 더 이상 동아리방의 기능을 하지 않는 듯 텅 비어있지만, 아들의 시집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그 때 도원을 가르쳤던 교수가 들어온다. 교수는 바쁜 자신을 대신해 한 남학생에게 정숙의 학교 안내를 부탁한다.
정숙은 시집의 제목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 속의 언덕을 찾고 싶지만, 학생이 데려와 준 학교의 언덕은 도무지 그 곳이 아니다. 그 때 자신의 가방에 시집이 없다는 걸 알고 다시 동아리방으로 뛰어간다. 다행히 한 여학생이 읽고 있는 걸 발견한다.
아들의 시집을 찾아 정숙은 호수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이 호수는 '오후 세시의 절망'의 영감이 된 듯 하다.
'호수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네. 매미가 운다는데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울었네. 쏟아지는 태양 아래 증인처럼 앉아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나. 오후 3시 호수 앞 매미가 운다네.'
호수에서 아까 본 여학생과 마주친다. 여학생도 아들의 시집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귀가 한쪽 들리지 않는데 양쪽 다 들을 수 없었던 시인의 시가 본인의 이야기 같아 좋단다. 그러면서 여학생은 귀가 들리지 않았던 아들의 마음과 삶을 떠올리게 하는 말들을 한다.
정숙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들에게 '종소리는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리는 거야'라고 정정해 줬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 본다.
그리운 아들의 발자취를 따라온 끝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 속 언덕은, 집으로 향하는 언덕이었다.
'보이는 것이 많아져 한참을 주저 앉아 시를 씁니다. 꽃잎이 진 자리에 밤이 오면 눈 마저 감고. 그 때마다 당신은 나를 부릅니다. 적막을 뚫고 오는 종소리. 언덕을 밀어내며 나는 일어나 길을 오릅니다. 생의 오른 편으로, 오른 편으로'
언덕에서 정숙은 아들을 떠올리며 주저 앉아 지긋이 눈을 감고 귀를 막아본다. 글을 배우며 아들의 세상을 들여다봤고, 두 귀를 막고 아들의 심정을 깊게 헤아리려 한다. 정숙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진 않지만 울음소리가 보인다.
이 작품은 방성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52회 휴스턴국제영화제 드라마 부문 금상, 18회 전북독립영화제 관객상, 16회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대상, 17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사랑에관한짧은필름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도원의 왜 요절했는지, 도원과 정숙의 관계는 어땠는지 등은 생략됐지만, 여백의 공간은 보는 이의 감정과 상상력을 넓힌다. 떠나간 사람의 흔적과 감정을 담담하게 따라가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슬픔의 농도가 짙다. 단편보다 장편으로 더 길고 오래 보고 싶은 영화다. 러닝타임 2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