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국 견제 사이에 낀 韓 반도체…'절묘한 균형' 전략 숙제
뜨는 반도체 잡기 위해 미·유럽·일본 나서 글로벌 기업 모시기 전쟁
한·미 중심 반도체 로드맵 짜되 중국 리스크 지속적인 모니터링 필요
한국 수출의 20%를 담당해온 반도체가 휘청이고 있다. 수요 부진과 가격 하락 추세에 제조사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첨단전략물자로 반도체가 지목되면서 차세대 기술 선점을 위한 국가간 경쟁까지 격화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기술 우위를 지속해온 메모리 반도체 뿐 아니라 미래 먹거리인 시스템 반도체를 아우르는 필승 전략을 다시 짜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기로에 선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중국에서 확대할 수 있는 반도체 생산능력을 5% 미만으로 확정하겠다고 미국 정부가 발표하자 국내 업계 안팎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산량 확충에 제동이 걸리면서 중장기 반도체 로드맵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의 실질적인 확장 기준을 명시한 이 '반도체법 가드레일(안전장치) 규정안'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정조준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반도체법(CHIPS Act),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줄줄이 내놓으며 중국의 기술 자립 시도를 총력 저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에 투자하는 미국 자본까지 틀어쥐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중국은 이런 미국 규제에 반발해 지난 5월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지하고, 지난달에는 갈륨·게르마늄 등 30개 품목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맞불을 놨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자국 기술력을 앞세운 화웨이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깜짝 공개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서로를 쥐고 흔드는 미·중 갈등 속 동맹국들마저 속속 합류하면서, 첨단 기술 및 공급망 전쟁은 갈수록 격화되는 모습이다.
일본은 미국의 대중국 제재에 호응해 7월부터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수출통제를 실시했다. 일본에 이어 네덜란드도 수출 통제 조치에 합류하며 미국 주도의 공급망 정책에 힘을 실었다. EU(유럽연합) 역시 지난 6월 양자기술, 첨단 반도체 등 민감 기술을 보유한 EU 기업의 과도한 제3국 투자를 제한하겠다고 밝히며 미국과 같은 배를 탈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호국을 끌어들인다면, 중국은 자국 반도체 기술력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기술 굴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중국 내 생산 비중이 적지 않고, 시장으로서의 중국도 챙겨야 하는 한국 반도체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중이며,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을, 충칭에는 후공정 공장을 두고 있다. 다롄에는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 공장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 1·2위 기업이 중국에서 만드는 D램·낸드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대규모 사업장을 운영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170억6000만 달러(22조2000억원), SK하이닉스는 249억 달러(32조4000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솔리다임(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대금까지 더하면 337억4000만 달러(43조9000억원)에 이른다.
상당 규모의 제조 기반을 둔 삼성과 SK로서는 지속적인 미국의 대중국 규제가 적잖은 부담이다. 중국 내 반도체 장비 반입 뿐 아니라 미 반도체 보조금의 대가로 내건 민감 정보 요구도 얽혀 있어 우리 기업들은 반도체 생산·판매에 대한 우려를 미 정부측에 꾸준히 제기해왔다.
그럼에도 최근 발표한 가드레일 최종 규정안에는 우리가 요구해온 '확장 기준 10%'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종료를 앞둔 중국 내 생산시설 반도체 장비 반입 역시 미국이 최종 의사를 밝히지 않아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양국 사이에 낀 삼성·SK는 장·단기전에 대비한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미·중 갈등 속 '규제 폭탄'을 맞고 있는 것과 별도로, 유럽·아시아로 확전되는 반도체 대항전에 대비한 로드맵도 새롭게 짜야한다.
최근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 시행 1년을 맞아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460여개의 투자 의향서와 더불어 219조원 규모의 투자 발표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강력한 보조금 정책으로 각국 기업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이 작년 통과시킨 반도체법에는 미국 내 투자 기업에 25%의 세액 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 정부는 반도체 보조금을 무기로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초과이익 공유, 민감한 회계자료 제출, 중국 공장 증설 제한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며 한국 기업들을 쥐어짜고 있다.
첨단전략물자로서의 반도체 중요성이 커지자 유럽, 아시아 국가에서도 속속 강력한 지원 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일본 정부는 보조금 형태로 파운드리 기업 대만 TSMC 2공장 설립 비용의 30%를 부담키로 했다.
TSMC의 일본 투자를 계기로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은 잇달아 신공장 투자 및 기존 공장 증설에 나서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는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물자의 자국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투자 기업을 위한 새로운 감세 조치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반도체 업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글로벌파운드리스가 프랑스에 설립하는 공장에 29억 유로(약 4조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반도체 장악력 확대한 시급한 이들은 세액공제, 인력, 인프라 등에서 혜택 경쟁을 벌이며 우량 기업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각국의 반도체 기업 모시기 전쟁 속 미·중 규제에 둘러싸인 한국 반도체로서는 대내외 리스크를 최소화할 전략이 절실하다. 현재로서는 국내에서는 용인을 중심으로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해외 투자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기흥·화성·평택 등 국내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은 10조원 이상을 투자해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앞으로 미국 지역에만 11개의 삼성 팹이 추가적으로 들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는 전공정은 아니지만 후공정(Advanced Packaging) 투자를 조율중에 있어 조만간 대미 투자 계획을 확정지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미국 등 해외 각국의 당근책이 더 강화된다면, 이후 K반도체의 투자 로드맵은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다.
한·미 중심 반도체 공급망을 고려하는 것과 더불어, 중국 리스크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최근 중국이 실시한 갈륨·게르마늄 수출 통제는 집적회로와 LED(발광다이오드), 차세대 전력반도체 소재 등으로 쓰인다. 이번 중국의 조치가 길면 길어질수록 제품 가격은 뛰고 수급은 불리해져 공급망이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특히 화웨이가 내놓은 스마트폰은 미국의 제재를 뚫고 첨단 반도체 장비를 갖춰야 하는 7nm(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프로세서를 갖춘만큼 기술 및 인재 유출 관리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은교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의 수출통제를 통해 본 첨단산업의 공급망 전략과 우리의 대응'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본인들이 레버리지를 가져가고자 하는 첨단산업과 기술에 대해 검토하고, 이 분야에서 우리 산업이 가지는 대중국 의존성과 경쟁우위 등을 대을 분석한 후 대응 방안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면서 "반도체 등 전략산업은 차세대 기술 분야에서도 산업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핵심 인력 관리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