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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하루와 밤'이 지난 간 후 [D:쇼트 시네마(57)]


입력 2023.12.14 13:28 수정 2023.12.14 13:28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이지후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무거운 수박 한 통을 들고 언니의 집 현관 벨을 누르는 서윤(강채윤 분). 그곳에서는 언니가 아닌 언니의 여자친구 해수(오우리 분)가 나온다. 서울에 특강을 핑계로 언니와 해수에게 하룻밤을 여기서 자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서현(오은재 분)이 동생 서윤에게 냉랭하게 대하자 해수가 살갑게 굴며 둘의 사이를 좁혀주려 하지만 쉽지 않다. 동생이 어렵게 들고 온 수박을 화채로 만들어 먹는 자리에서도 한 숟갈 퍼먹더니 이내 동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한다.


언니와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찾아왔지만 언니가 틈을 주지 않자 다시 집에 나가려는 찰나, 서윤의 이부자리를 봐주려던 언니와 마주친다. 서현과 서윤의 대화를 통해 서현이 커밍아웃을 해 가족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누구보다 가까웠던 동생까지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아 마음의 문이 닫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윤은 언니가 누구를 좋아해도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서현의 마음까지는 닿지 못하는 모양새다. 다음 날 아침, 서현은 출근, 서윤은 버스를 타기 위해 나란히 걷는다. 서현은 서윤에게 버스 타는 곳을 알려주고 잘 가라는 말도 없이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하지만 이내 마음에 걸렸는지 뛰어와 청포도 사탕과 함께 만 원을 쥐여주고 다시 왔던 방향으로 뛰어간다.


여름 날 들고 온 수박은 서윤의 무거운 마음을 상징한다. 수박으로 언니와 말 한마디 더 섞어보고 싶지만 자꾸만 밀어내는 언니의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동생을 차마 한 밤 중에 쫓아낼 수 없어 자리까지 펴주는 언니는 가족이라는 존재 안에서 서로 묶여 있다. 언니는 멀어지려고, 동생은 가까워지려고 원을 반복해서 돌지만, 이탈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부정해버리니 서현이 받은 충격과 실망은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윤은 단지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언니에게 동성애를 부정하라고 했을 뿐, 언니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하루와 밤을 보낸, 서현과 서윤은 무언가 특별한 말 한마디, 행동 없이 자매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단지 서윤의 입에서 언니가 준 단단했던 청포도가 살살 녹기 시작했다. 러닝타임 19분. 이지후 연출.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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