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한파…韓 반도체 역대급 적자에 감산
'반도체' 놓고 美 규제 中 굴기 日 부활
AI '훈풍'…HBM·DDR5 등 고부가 제품 각광
올해는 극심한 반도체 한파로 국내 기업들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한 해였다. 삼성·SK 등 메모리 제조사들은 궁여지책으로 감산을 택했고 재고 줄이기에 안간힘을 썼다. 올 여름 피크를 찍었던 재고는 하반기부터 점진적으로 완화되면서, 제조사들의 숨통도 조금씩 트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반도체 불황이 극심했지만, AI(인공지능) 시대 개화로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제품이 크게 주목을 받은 한 해이기도 했다. AI가 차세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삼성과 SK는 기술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반도체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자, 미·중 뿐 아니라 EU·일본 등도 전략적 투자를 실시하는 등 반도체 경쟁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됐다.
◆메모리 한파…韓 반도체 역대급 적자에 감산
올해 삼성·SK·마이크론 등 3대 메모리 제조사는 나란히 조 단위 영업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 3분기 누계 영업손실은 12조6900억원이며, SK하이닉스는 8조760억원에 달한다. 4분기에는 일부 사업부에서 흑자가 예상되나 누적된 적자를 만회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국내를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이렇게 주저앉은 데는 고금리·고물가 여파로 주요 고객사들이 일제히 보수적 경영으로 돌아선 데 있다. 고객들의 구매 심리가 둔화되고, 재고 조정 모드로 돌아서자 반도체 가격은 D램·낸드를 중심으로 곤두박질쳤다. 반도체를 팔아야 하는 데 사줄 곳이 없으니 재고는 계속 쌓였고 재고 자산평가손실은 확대됐다.
유례없는 반도체 업황 부진에 제조사들은 결국 공급 줄이기를 택했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작년 말부터 감산에 돌입했고, 메모리 1위 기업인 삼성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올 초부터 생산 축소 계획을 밝혔다. 기업 마다 20~30% 가량의 감산을 실시했으나 고객사들은 여전히 지갑을 열지 않았고, 제조사들의 적자는 계속 불어났다.
하반기 들어서야 감산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D램·낸드 가격도 하락을 멈추고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공지능(AI)용 메모리인 HBM3, 고용량 DDR5와 더불어 고성능 모바일 D램 등의 판매가 개선되면서 SK하이닉스는 D램 사업의 경우 3분기 흑자로 전환됐다. 마이크론 CEO인 산자이 메로트라도 최근 실적 발표를 통해 반도체 수급 균형이 회복되고 가격도 올라갈 것으로 전망하는 등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시사했다.
D램을 중심으로 반도체 업황 개선이 예상되는 것과 달리, 낸드는 여전히 답보 상태로 제조사들이 감산을 지속하고 있다. 낸드는 D램과 다르게 AI 수혜가 적을 뿐더러 경쟁사들이 많아 출혈 경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사들의 재고 조정이 일단락됐다는 판단이 들 때까지 제조사들은 레거시(범용) 제품 위주로 낸드 감산을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도체' 놓고 美 규제 中 굴기 日 부활
첨단전략물자로서의 반도체 가치가 상승하면서 반도체 경쟁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됐다.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첨단전략물자로 반도체가 대두되면서 미국, 유럽, 일본 등 각국은 제조 설비 투자·공급망 확대에 안간힘을 썼다.
이런 가운데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지난해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과시킨 미국은 반도체 장비 및 AI칩에 대한 추가적인 수출통제로 중국을 압박했다. 미국이 엔비디아 등 자국 기업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일 강력한 규제와 메시지를 쏟아내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전면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이에 질세라 중국은 자국 반도체 기술로 만든 휴대폰, 노트북 등을 공개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 9월 7nm(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를 탑재한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메이트 60 프로'에는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5G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인 '기린 9000s'가 적용됐다.
미·중이 물고 뜯는 싸움을 벌이는 와중, EU와 일본은 반도체 강국을 위한 전략적 투자에 나섰다. 일본은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투자를 유치하며 메모리-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R&D(연구개발)을 아우르는 '반도체 부흥' 기반 구축에 골몰하고 있다. 일본 현지 기업 중심으로 뭉친 라피더스를 통한 파운드리 기술 역량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도 반도체 패권 우위를 정조준하며 인텔, TSMC 유치전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많게는 조 단위 보조금을 책정해 반도체 기업들이 자국에 투자 깃발을 꼽을 수 있도록 나서고 있다. 이같은 강력한 보조금 정책으로 한국(메모리 반도체), 일본(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대만(파운드리), 미국(원천 기술)과 반도체 생태계의 한 축을 구성,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 대전이 글로벌 강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한국 반도체가 받는 도전도 거세졌다. 지난 4월 미국은 효과적인 '중국 때리기'를 위해 한국 업체가 우회적으로 중국에 도움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중국이 자국 내 생산기반을 둔 마이크론에 제재를 가하자 한국 기업이 마이크론 감소분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한 것이다.
미국이 때리고 중국이 반격하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는 새로운 출구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전체 반도체의 절반을 중국에서 생산하는 삼성과 SK으로서는 어느 한 편에만 호응하고 다른 한 편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경제·안보 측면에서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을 고취시키는 차원에서 한국 반도체의 '전략적 모호성' 입장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AI '훈풍'…HBM 등 고부가 제품 각광
역대급 반도체 한파 속에서도 AI 관련 수요가 늘어난 것은 메모리 제조사들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AI에 대한 관심은 GPU(그래픽처리장치), HBM 수요 급증으로 이어졌다. 기술 선두를 달리고 있는 SK와 삼성은 앞다퉈 HBM3 공급을 늘리며 수익 확보에 나섰다.
HB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TSV로 수직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부가가치 제품을 말한다. 현재 제조사들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중이다.
여기서 HBM3e는 HBM3의 확장형 모델로, 속도부터 발열 제어, 고객 사용 편의성 등 모든 측면에서 현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격도 기존 제품 보다 5~7배 비싸기 때문에 팔수록 이득이다. SK하이닉스의 3분기 흑자전환의 일등공신도 HBM이 꼽힌다.
AI 시장 훈풍에 힘입어 삼성과 SK는 앞다퉈 자사의 앞선 기술을 과시했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고 성능으로 개발한 HBM3e를 앞세워 HBM 강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미 HBM3와 HBM3e를 포함한 내년도 SK 생산분은 '완판'됐다.
삼성전자도 3분기 HBM3 제품 공급을 시작하고 4분기 판매 확대에 나섰다. 내년에는 HBM 공급 역량을 올해 보다 2.5배 늘려 업계 최고 수준으로 확장하겠다고 했다. 마이크론도 연내 HBM3e 양산에 돌입, 내년부터 매출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내년에는 빅테크들이 구조적 투자에 열을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은 자체 AI칩을 만들겠다며 이 시장 지배력이 큰 엔비디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쟁 AI칩에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를 지원하는 HBM 등의 수요도 덩달아 늘어나기에 메모리 제조사에게는 호재가 될 전망이다.
AI 열풍 주역인 HBM의 뒤를 이어 CXL(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가 차기 격전지로 지목된다. CXL은 HBM, PIM(프로세싱 인 메모리)와 함께 AI 분야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 꼽힌다. CXL은 메인 D램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확장성을 높여 메모리 용량을 늘린 것이 특징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주요 데이터센터, 서버, 칩셋 업체들과 협력하며 CXL 솔루션을 개발,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