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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현상과 운동권 문제


입력 2023.12.26 06:06 수정 2023.12.26 06:06        데스크 (desk@dailian.co.kr)

현 운동권, 저항적 민족주의나 동양적 신비주의에 기초

급진 분파, 6월 민주화운동을 정권타도 투쟁으로 몰고 가

80년대 운동권 시대, 87년에 끝나고 그것 계승한 것은 비권

386의 세계관이 너무 오랫동안 극성을 부렸기 때문에 지체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면서 파란이 일고 있다. 한동훈 현상은 다양한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운동권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386 운동권이 대학생이었던 것은 대체로 19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반이다. 반면 운동권 이념이 정초된 것은 1970~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이념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 도시화가 본격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는 60년대까지의 농촌 문화와 70년대 초반 본격화되고 있는 도시화가 충돌했다. 도시화를 배경으로 대도시에 대학생들이 집적되기 시작하는데 20대 초반 대학생은 당시 20대 초반 청년의 약 4%였다고 한다.


70년대 도시화와 함께 대도시에 미국 문화와 감수성이 확대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미국 팝송을 즐기고 매주 토·일요일 황금시간대에는 600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등 미국 오락물이 주말 시간대를 장악했다.


과학과 공학, 경제학 등의 학문도 미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미국의 전자 산업, 컴퓨터 과학(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등)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존재하는 가운데 대학 졸업 후 학생들 다수는 주로 미국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미국 중심의 선진 문물에 대한 열정이 지배하는 가운데 주로 철학·역사 등의 영역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와 제3계 민족주의가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관념론, 프랑스의 급진 민주주의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적 세계관, 제3세계 민족주의 등이 영향력을 유지·확대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서적과 사람이 1974년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인데 리영희는 70년대 동아시아 사회주의와 거기서 배태된 신비주의적 성향을 갖는 인간론에 경도되었다. 그리고 그 자장권하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운동권 뿌리가 되는 역사인식이 확산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 운동권 대부분은 80년대 중후반 90년대 초반의 반독재투쟁을 뿌리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했던 사상과 감수성은 선진 자본주의 진영의 현대적인 민주주의라기보다는 70년대 저항적 민족주의나 동양적 신비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따라서 386의 민주주의는 현대적 의미의 선진국 민주주의는 다른 제3세계 그리고 사회주의적 성향을 짙게 가미한 민주주의였다. 386의 민주주의가 아예 민주주의가 아닌 인민민주주의로 분류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80년대 초반 한국 민주주의는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경제정책 또한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변화기 시작했다. 8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전격 진입했고 90년대 초반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함께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정치체제도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이 본격 성장하기 시작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마이카 붐 등 90년대는 70년대의 낙후한 이미지를 털어 내며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 일신하고 있었다. 경제성장과 중산층의 형성과 발전, 선거 민주주의를 결합하면 80년대 중후반 한국 민주주의는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사실상 87년과 같은 격렬한 민주화투쟁은 불필요한 무엇이 되고 있었다. 물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운동은 여전히 중요했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이어 노동조합의 건설, 노동조건의 개선이 필요했고 환경, 여성 등 다양한 의제를 다루는 시민운동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987년 이후 학생과 청년들은 사회의 점진적 발전과 개선을 기본으로 놓고 학업에 정진하여 각계각층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반면 6월 민주화운동에서 주도권을 가졌던 급진 분파들은 6월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정권타도 투쟁, 또는 자주통일로 몰고 갔다.


1996~97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김영삼 정권 타도 투쟁을 제기하며 90년대 중후반 서울 도심을 화염병으로 물들였다. 그들은 선거가 진행되더라도 한국이 식민지임으로 타도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주와 통일 없이는 직선제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며 무리한 자주통일운동을 결행했다.


시대의 추이를 살펴보면 87년 이후 한국에서, 87년과 같은 격렬한 반독재투쟁은 불필요했다. 87년 이후라면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운동의 맥락에서 본다면 87년 이후는 이른바 비권이 역사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다. 한동훈과 조정훈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반면 87년 이후에도 고집스럽게 운동을 이어간 사람들이 있다. 한총련이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을 운동, 민족주의적 성향, 거리 투쟁 중심과 같은 요소를 중심에 두고 양자를 하나의 틀로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민주당에서 전대협 운동권이 사라지면 한총련이 그를 계승할 것이라는 인식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전대협은 한총련에 의해 계승된 것이 아니라 80년대 운동권의 시대는 87년으로 끝나고 그것을 계승한 것은 비권이며 한총련은 그에서 한참 이탈한 마이너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대협도 그러했다. 전대협의 운동의 시대에 운동의 역할을 수행하며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한국의 추이에 맞지 않는 제3세계·혁명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대협 세대는 민주화운동을 확장한 일련의 주장과 생각들을 너무 장기간 유지했고 (적어도 2000년대 20년간) 386 세대의 건설적인 퇴장이 지체되었으며 기어이 강한 운동적 성향을 갖는 문재인 정권을 불러냈고 그 역풍으로 윤석열 정부가 탄생했다. 그들은 심지어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운동의 시대를 강조하며 기어코 한동훈과 같은 인물을 불러내고 있다.


한동훈은 80년대 운동의 시대가 끝나고 전문성의 시대가 도래했던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아마도 시대의 적자인 듯하다. 그럼에도 한동훈의 출현이 무려 30년이 돼서야 실현된 것은 80년대 운동의 시대를 장악했던 386의 세계관이 너무 오랫동안 극성을 부렸기 때문인 것 같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대안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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