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노소영 이혼 문제인 듯 보이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두운 유산 털어내는 문제
유책배우자의 배상 책임을 높이는 것과 역사적 진실은 다른 문제
노태우의 딸이 가장 큰 '쿠데타 성공보수'를 챙기는 꼴…감당할 수 있나
'노태우 비자금' 규명 필요…대법원 전원합의체서 판단해야
"선입견은 적이야. 보이는 것도 안 보이게 만드니까 말이지."
일본 추리 소설계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대목이다. '용의자 X'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가는 일반적인 미스터리와 달리 처음에 범인을 제시하고 그의 트릭이 무엇인지 밝히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소설로 출간된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 영화로도 소개돼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기하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함수 문제"란 이 소설의 한 대목을 빌어 본론부터 말하자면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은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두운 유산을 털어내는 문제다.
역사적으로 풀어야 할 알리바이를 이혼 문제로 빠지게 한 노 관장과 역사 문제로 되돌려 놓으려는 최 회장이 벌이는 싸움이다. 최 회장 측에서 보면 노 관장에 대한 대중들의 동정 여론 속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속이는, 그래서 그릇된 방향을 지시하는 이른바 '트릭'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실 최 회장과 노 관장 간 소송에서 재산 분할 액수는 부차적인 문제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재판은 1조3808억원이라는 역대 최고 재산 분할 액수보다 판결 근거로 SK그룹의 성장에 노 관장의 부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상당한 역할이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앞서 2심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선경 300억' 메모,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 사진을 근거로 노 전 대통령 비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 부친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건네졌다며 노 관장 측이 SK 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봤다.
또 최 선대회장이 태평양증권과 한국이동통신을 모험적으로 인수한 배경엔 노 전 대통령과의 사돈 관계가 일종의 보호막이란 인식이 있었다면서 노 관장 측의 무형적인 기여까지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최 회장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 회장은 6공과의 관계가 오랜 기간 회사 이미지와 사업 추진에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1994년 최 선대회장이 증여한 2억8000만원으로 대한텔레콤 주식을 매수해 그룹 지배력을 확보했다는 입장이다. 노 전 대통령도 2011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 나와 청와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사전 각본대로 움직였다'는 모함을 받고 있다"고 억울함을 피력한 바 있다.
노태우 딸이 가장 큰 '쿠데타 성공보수' 챙겨서야…감당할 수 있나
특히 재판부는 이 300억원이 노 전 대통령의 앞선 형사 재판에서 인정된 비자금과는 별개의 돈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기업들에서 4100억여 원의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1997년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2628억원이 추징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 자신의 전 재산이 5억2000만원이라며 구체적인 내역까지 공개했다.
재산 목록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과 주식, 예금, 부동산 등이 있었다. 스스로 공개한 재산이 5억원 정도에 불과한데 집권 4년 차에 전 재산의 60배 가까운 돈을 합법적으로 취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시골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1991년도 기준으로 볼 때 300억원이 (분할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의) 불법적인 돈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300억원의 조성 경위나 불법성 여부 등은 따지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가 법리나 법적 검증보다는 유책배우자의 배상 책임을 높이기 위해 'SK는 노태우 사돈 기업'이란 선입견이나 편견들을 판결에 대거 반영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아무리 이혼 소송이라지만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정경유착 등의 불법 요소를 재산분할에 반영한 것은 반역사적 판결이다. 과거 이미 우리 사법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뇌물죄 등의 책임을 물었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은 역사적으로 12·12 쿠데타와 6공화국을 연결하는 상징성이 있다. 영화 '서울의 봄'에는 전두광이 반란군 지휘부가 집결한 경복궁 30경비단 화장실에서 노태건에게 "저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묵을라꼬 있는 기거든. 그 떡고물 주딩이에 이빠이(가득) 쳐넣어줄 기야. 내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두광의 말처럼 현실의 반란세력은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공기업 사장, 국회의원, 심지어 대통령까지 됐다.
그리고 이제 노태우의 딸이 가장 큰 '쿠데타 성공보수'를 챙기게 된다.
상고이유서에 '노태우 비자금' 정면 반박…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맡아야
실제 2심 판결 직후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는 "부도덕한 신군부 비리 자금이 조성되는 동안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신군부의 만행에 의해 총살되고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부상을 입고 감옥에 가고 집단 수용돼 인권유린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이혼 소송에서 드러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해 과세해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물론 유책배우자로서 최 회장이 개인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SK그룹 성장에 어마한 기여를 했다고 판단한 것은 역사적 규명이 필요하다. 노 관장 측의 주장과 재판부의 판단대로 300억 원이 SK에 흘러갔다고 인정하더라도 ‘불법 비자금’일 수 있는 돈을 노 관장의 '기여'로 인정한 것도 문제다.
최근 최 회장 측은 대법원에 약 500쪽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제출했다. 이유서엔 △노 관장 부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 메모의 진위 △노 전 대통령이 SK 경영에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는 이른바 '6공 특혜' 논란 △2심 재판부의 대한텔레콤(현 SK C&C) 주식 가치 산정 오류(주당 1000원으로 정정) △최 회장의 대한텔레콤 주식 매수 자금 출처 △최 회장이 친족들에게 증여한 SK 주식이 재산 분할 대상에 포함된 부분 등을 주요 쟁점으로 다투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같이 역사적으로 사법적 평가가 필요한 쟁점이다. 이에 따라 법조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소부가 아니라 전원합의체에서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동안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내란 사건 등 역사적 기록이 될 만한 사건들을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해왔다. 그리고 이번 판결로 수십 년 한국 현대사를 짓밟아온 그런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