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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사랑할수록’ [Z를 위한 X의 가요㉑]


입력 2024.09.01 10:51 수정 2024.09.01 10:51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까지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X세대는 ‘절약’이 모토인 기존 세대와 달리 ‘소비’를 적극적으로 한 최초의 세대로 분석됩니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면서 개성이 강한 이들은 ‘디지털 이주민’이라는 이름처럼 아날로그 시대에 성장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한 세대이기도 하죠. 그만큼 수용할 수 있는 문화의 폭도 넓어 대중음악 시장의 다양성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꼽히는데, 이들이 향유했던 음악을 ‘가요톱10’의 90년대 자료를 바탕으로 Z세대에게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가요톱10’ 1994년 8월 5주 : 부활 ‘사랑할수록’


◆밴드 부활은,


걸출한 기타리스트인 김태원이 1984년 결성한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 ‘디 엔드’(The End)가 모태다. 부활로 이름을 바꾸고 1985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현존하는 국내 최장구 록그룹 가운데 하나다. 부활의 첫 보컬은 김종서였지만 공식 데뷔 전 탈퇴하고 새 보컬 이승철을 합류시켜 1986년 명곡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등이 담긴 1집 앨범 ‘록 윌 네버 다이’(Rock Will Never Die)를 내놨다. 이 앨범은 30만장 이상의 음반판매량을 기록하며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리더였던 김태원이 대마초 흡입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2집 앨범은 실패했고, 이승철은 팀은 탈퇴해 솔로 앨범 ‘마지막 콘서트’(1989)로 큰 인기를 끌며 승승장구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부활’이라는 팀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침체기를 겪다 다시 부활하며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사랑할수록’ ‘소나기’ ‘론리나이트’ ‘생각이 나’ ‘친구야 너는 아니’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오랜 역사를 지나는 동안 멤버 변화도, 팀이 해체될 위기도 잦았다. 특히 2000년 발매한 7집에서는 김태원을 제외한 멤버가 모두 교체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프로트맨도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는데 그룹의 프론트맨인 보컬을 발굴하는 데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김태원의 스타일 때문인지 부활을 거친 보컬들은 그야말로 국내 대중음악사에 한 획은 그은 가객들이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김종서와 이승철을 비롯해 김재기, 박완규 등이다. 이밖에도 김재희, 김기연, 이성욱, 정단, 김동명 등이 보컬을 거쳐갔다. 이중 이승철은 한 차례 팀에서 나간 이후 ‘네버 엔딩 스토리’가 담긴 8집 앨범(2002)으로 재합류했다가 해당 앨범을 끝으로 또 다시 팀과 결별하기도 했다.


ⓒKBS

◆‘사랑할수록’은,


1993년 발매된 3집 ‘기억상실’의 타이틀곡이다. 이 앨범은 부활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음반으로 꼽힌다. 1991년 대마초 복용으로 입건돼 교도소에 가게 됐던 김태원에게 성공적인 재기의 발판이 됐다. 김태원이 작사, 작곡, 편곡했다.


‘사랑할수록’은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날 연습하면서 녹음했던 것을 정규 음반에 담아낸 곡이기도 하다. 데모 트랙임에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데, 김태원이 라디오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곡은 녹음실에서 악보를 받아 즉석에서 부른 것이 아니고 정식 녹음 하기 전 매일 김재기와 만나 곡의 표현 방법을 의논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을 반복하면서 곡의 완성도를 위해서 오랜시간 함께 교류하여 고행 끝에 나온 곡이라고 한다.


이 곡은 무려 100만장 이상의 음반판매량을 기록했다. 부활의 역대 최다 판매량을 가진 앨범이다. 곡이 대박을 치면서 김재기의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 자리를 이어받아 활동했다. 김재희에 따르면 발매 6개월이 지나서도 큰 반응이 없어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김태원과 함께 우연히 지나던 이대 앞 옷가게에서 5분 간격으로 이 곡이 들려 그제야 성공을 직감했다고 한다.


김태원은 한 방송에서 “데모 테이프 들고 기획사를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좌절의 끝이라 생각하면서도 열정 하나로 녹음을 해준다는 기획사 한 곳을 찾아내서 녹음했다”면서 “어느날 새벽 2시에 전화가 왔다. 김재기의 차가 견인되자 차를 찾아오기 위해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 당시 40만원짜리 중고차가 견인이 됐다고 3만4000원이 없어 나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내가 2000원도 없어 ‘돈이 없다. 미안하다’ 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그날 일기에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고 적었다 . 음반 몇 백만장이 팔린 1993년을 함께 맞지 못하고 한 사람이 떠났다. 길거리에서 ‘사랑할수록’이 나오는 한 재기는 살아있다. 그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말했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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