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장 '갈팡질팡' 메시지 사과
'자금 절벽' 내몰린 서민들만 혼란
“죄송하고 송구하다.”
꿈틀대는 가계대출을 이유로 은행을 향해 연신 회초리를 들어 왔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끝내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 원장은 전날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가계부채 관련 은행장 간담회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 사이에 급증하는 가계대출 관리에서 세밀하게 입장을 내지 못한 부분, 국민이나 은행 창구에서 직접 업무 보는 분들이 불편함과 어려움 겪은 것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그동안 자신이 은행권의 대출금리 인상을 비판해 은행들이 대출 규제를 내놓자 이로 인한 실수요자 피해를 지적하는 등 시장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원장의 말 한 마디에 시장의 혼란이 계속 커지면서 서민들의 민심도 바닥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이 원장의 사과로 시장의 혼란이 사그라들지는 미지수다. 너무 늦은 사과가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동안 금융당국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은행 탓만 늘어 놓았던 모습들이 오버랩된다. 서민의 입장에선 금융권의 컨트롤타워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가계대출 증가는 올해 초부터 감지돼 왔다. 지난 4월과 5월에 매달 5조원씩 넘게 급증했던 터였다. 그런데도 금융당국은 당초 7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를 9월로 돌연 연기했다.
두 달의 시간은 가계대출 폭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소상공인 금융지원 등을 위한 연기였다지만 결국 대출 ‘막차’를 타려는 수요를 자극했던 것이다. 지난 8월 가계대출은 5대 은행에서만 9조원 넘게 증가하며 대대적인 기록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보면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실패다.
정부는 화살을 곧장 은행권으로 돌렸다. 그 결과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줄줄이 인상했고, 이제는 대출 한도와 기간까지 반 토막 내며 당국의 명령에 순종 중이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도 혼란스럽다고 주장하며 동정 여론을 형성했다. 일관되지 못한 정부 정책이라는 핑계가 어느 정도 면피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출 금리를 올려 은행들이 손해를 볼 건 없다.
가계대출은 주담대를 중심으로 증가했고, 이 돈들은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수도권 집값은 계속 오르고 있고, 한국은행은 부동산 시장 자극을 우려해 기준금리 인하 시기를 늦췄다.
문제는 서민들이다. 특히 집 없는 서민들의 거주비 부담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의 가계대출 옥죄기가 주담대에 이어 전세자금대출까지 향하고 있어서다. 주택 실수요자들의 기존 주담대 금리가 높아지거나 신규 대출에 제약이 많아지면서 내집마련과 전세 자금 마련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서민들이 “내 집 마련하려는게 죄냐”며 울분을 토해내는 이유다.
대출이 줄면 매수할 수 있는 가격대의 매물이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결국 매수수요가 전세나 월세로 들어가게 된다. 임대차 수요 증가는 결국 전셋값에 이어 매매가까지 밀어 올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문재인 정부 말기에 불거졌던 집값 폭등이 재현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금융당국의 갈지자 정책과 은행들의 과격한 행보가 낳은 후유증은 고스란히 서민들의 몫이다. 더 이상의 ‘뒷북’ 사과는 의미가 없다. 이제 구체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따라와야 한다. 대출 절벽에 몰린 서민들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