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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원 데이’에서 만난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 [다시 보는 명대사⑭]


입력 2024.11.25 08:31 수정 2024.11.25 08:31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넷플릭스 드라마 ‘ONE DAY’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ddazero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는 영국 드라마 ‘원 데이’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자국 유명 작가들의 책에서 인용된 어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자주인공 엠마(암비카 모드 분)가 절친 탈리(엠버 그래피 분)의 결혼식 축사에서 인용한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 속 구절, ‘인생에서 어떤 한 하루가 빠져버린다면, 그 잊지 못할 중대한 날에 첫 고리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와 당신의 관계나 우리의 인생은 달랐을 수 있다’는 내용도 인상 깊지만.


개인적으로 14화 시작에서, 엠마가 덱스터(리오 우들 분)에게 읽어주던 책 구절에 마음이 더욱 크게 공명했다.


덱스터 메이휴와 엠마 몰리의 20년에 걸친 사랑과 우정 ⓒ이하 넷플릭스 제공

총 14부작인 ‘원 데이’는 1988년부터 2007년까지 딱 20년 동안 7월 15일에 벌어지는 엠마 몰리와 덱스터 메이휴의 이야기다. 12화까지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매해 7월 15일, 드라마 속 설명을 빌면 그날 비가 오면 여름 내내 40일 동안 비가 내린다는 ‘세인트 스위딘스 데이’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13화와 14화에서는 2000년에서 2007년의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흐른다.


그런데 14화 시작부에서는 엠마와 덱스터가 대학교 졸업식에서 처음 만났던 그해,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22일, 성탄절 분위기가 한껏 오른 덱스터의 집으로 놀러 간 엠마가, 양탄자 깔린 바닥에 누워 덱스터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캐릭터 궁합 100점, 영화 ‘원 데이’보다 왠지 마음에 드는 캐스팅. 위쪽부터 엠마 역의 배우 암비카 모드, 덱스터 역의 배우 리오 우들. ⓒ

곧 소개할 소설 속 구절이 좋아서기도 하지만, 충격적 13화 엔딩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은 뒤 맞이한 14화의 시작이어서 또 7월 15일이 아닌 날의 이야기여서 감정이 더 고조됐는지도 모르겠다. 엠마가 읽는다.


“그녀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들이었다

자신의 생일과 그 밖의 여러 날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 날 오후 훨씬 더 중요한 날이 따로 정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는 날이었다.

눈에 띄지 않지만 앞으로 언젠가 틀림없이 다가올 죽음의 날 말이다. 그날이 언제일까.”


사실 처음엔 영국 작가 토머스 하디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이하 ‘테스’) 속 구절인 줄 몰랐다.


# 이 아래에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계속 어긋나는 타이밍.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

책을 읽어주던 1988년 당시 작가 지망생이었고 늘 사고가 깊던 엠마는 태어난 ‘생일’이 있듯, ‘죽음의 날’이 인간에게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의 말대로 14세에 소설 ‘테스’를 읽으며 감명받았던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알게 된, 첫눈에 반했지만 여러 두려움 속에 장차 인생 로맨스가 사랑을 하룻밤 설렘으로 ‘정지’ 시켜버린 그해, 엠마는 덱스터에게 책 ‘테스’를 선물하며 ‘너도 이제 알 때가 됐다’며 방종한 자유를 접고 삶에 진지해지기를 권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덱스터는 자유와 방탕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서로 어긋나는 고백의 타이밍 속에 둘은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했고 동거나 결혼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별을 넘어선 진한 우정마저 중단, 절연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늦은 때란 없다, 사랑하기에 지금이 가장 빠른 때 ⓒ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어긋남을 지나 드디어 자존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둘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결혼해서 함께 살 집을 구하며 미래를 함께 꿈꿨다. 운명의 장난인가, 덱스터와 엠마에게는 거기까지만 허락됐다.


어렵게 이뤄진 사랑, 자신보다 더 믿고 사랑하는 엠마를 잃고 덱스터는 1988년 12월 22일 엠마가 읽어줬던 ‘테스’ 구절이 전하던 의미가 그제야 뼛속 깊이 박혔을 터. 사랑을 잃고 덱스터는 인생을 송두리째 강탈당한 슬픔과 절망과 회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해마다 ‘태어난 날’을 축하하면서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없음을 알면서도, 마치 ‘내가 죽는 날’은 없을 것처럼 산다. 천 년, 만 년 사는 존재인 듯, 영원한 삶을 허락받기라도 한 듯 욕심내어 돈을 추구하기도 하고 사랑이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기도 한다. 사실은 내일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태어난 것보다 더욱 명백하게 인간의 죽음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다.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문학동네 펴냄 ⓒ책 표지, 문학동네 제공

영국 작가 데이비드 니콜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원 데이’에서 엠마는 장르 특성상 ‘테스’의 구절을 알기 쉽게, 글의 아름다움은 보존하되 축약해서 읽었다. 2011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낸 세계문학전집 72권, 이듬해 발행된 전자책을 기준으로 하면 위의 문구는 기사 마지막에서 소개할 문단에서 발췌됐다.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 전체에서 보면, 제1단계 ‘처녀’에서 제7단계 ‘완료’에 이르는 글 가운데 제2단계 ‘처녀 이후’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제3단계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테스의 심리적 변화, ‘유레카’(일순간 철학적 깨달음)의 장면이라 할 대목이다.


이해를 위해 해당 문단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줄거리를 간략히 추리자면. 자신이 명문 더버빌가(家)의 후손임을 알게 된 테스의 아버지는 딸을 부유한 친척 가문에 하녀로 보내 가난을 면하려 한다. 그러나 테스는 끈질기게 구애하던 알렉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의 정부가 돼달라는 알렉을 뒤로 하고 임신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기가 태어나지만 사생아라 세례를 받지도 못하고,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고 드디어 ‘원 데이’의 문구. 야무지게 똑똑했으나 장녀로서 집안의 희생양이 된 것을 시작으로 성폭행과 임신, 자식을 앞세우는 고통까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테스가 어느 날 오후 거울을 보다가 문득 삶과 죽음, 인생의 원리를 깨달으며 ‘소문’과 ‘시선’으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는 장면이다.


1년을 지내면서 중요한 날들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보기도 했다. 체이스 숲의 어둠을 배경으로 몸을 버린 트렌트리지에서의 끔찍했던 밤, 아기가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자신의 생일, 그리고 자신의 행위로 개별적 의미를 갖게 된 나날들. 어느 날 오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여다보던 테스는 불현듯 이런 날보다 더 중요한 날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릴 자신의 기일이었다. 한 해의 다른 날들 가운데 슬그머니 숨어 있어 테스가 매년 그날을 지나 보낼 때 신호를 보내거나 소리를 내지 않는 날-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날. 그날은 언제일까? 해마다 그 차가운 친척을 지나치면서 왜 냉기를 느끼지 못했을까? 그녀는 제러티 테일러처럼, 앞으로 언젠가 “오늘이 가엾은 테스 더버빌 죽음의 날이구나”라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말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무슨 특별한 생각이 떠오를 리 없다. 그날, 그녀의 인생을 영원히 마감하는 종착역이 될 그날이 어느 달, 어느 주, 어느 철, 또 어느 해가 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책에는 ‘제러티 테일러’에 ‘거룩한 삶’ ‘거룩한 죽음’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17세기 영국의 목사이자 설교자라는 설명이 보태있다.


드라마 ‘원 데이’ 포스터. 현실 연애, 사랑과 우정 사이, 그리고 눈물과 깨달음 ⓒ

엠마도 테스처럼 자신의 ‘죽음 일’이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주일지 알지 못했다. 여러 날 중 숨어 있다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하물며 만들어진 인물의 죽음임에도 뜨거운 눈물이 솟은 것은 엠마라는 지적이면서 솔직하고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를 좋아했고, 엠마 없이 살아갈 덱스터의 남은 날들이 안쓰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렵게 이뤄진 사랑이 너무 짧게 끝나서만도 아닐 것이다.


내게도 닥칠 수 있는 일임이 일순간 절감됐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무겁고도 어려운 질문이자 피할 수 없는 인생 과제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원 데이’가 우리의 턱을 인생 쪽으로 돌려세운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고 키우는 선택을 하고 행하며 살고 있는지, 내일 죽어도 후회 적게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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