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극장의 ‘레퍼토리 시즌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관객들에게 다양하고 수준 높은 공연을 제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레퍼토리의 지속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시즌제를 통해 예술단의 제작 역량을 강화하고,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예술 경험을 제공하며, 극장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 대표적 사례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을 이끄는 안호상 사장은 2012년 국립극장장 시절 국내 제작극장 최초로 시즌제를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2021년 세종문화회관에 취임한 이후 안 사장은 ‘예술단 중심의 제작극장’으로 거듭날 것을 공표했다. 이는 일종의 레퍼토리 시즌제 극장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실제로 2022년부터 ‘싱크 넥스트’라는 이름으로 컨템퍼러리 시즌을 운영하며 동시대 예술을 소개하고 있고, 2025 시즌에는 서울시예술단의 레퍼토리 작품 11편을 포함해 총 29편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2025 시즌 라인업에 오른 작품 면면만 보더라도,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화제를 모은 서울시극단의 연극 ‘퉁소소리’,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전회차 매진을 기록한 서울시무용단의 ‘일무’, 서울시오페라단의 ‘파우스트’, 4년 연속 매진을 기록한 서울시합창단의 ‘헨델, 메시아’, 방송인 이금희가 해설을 맡은 ‘가곡시대’, 클래식과 국악이 어우러지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믹스드 오케스트라의 ‘넥스트 레벨’, 서울시발레단의 ‘캄머발레’ 등이 레퍼토리로서 무대에 오른다.
안호상 사장은 역시 지난 21일 서울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스튜디오에서 열린 ‘2025년 시즌 사업발표회’에서 “검증된 레퍼토리(상시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의 고유 작품), 확실한 설득력이 있는 작품으로 올해 승부를 내야겠다고 생각한다”며 차별화된 레퍼토리를 올해의 주된 작품 방향으로 내세웠다.
국립극장도 안호상 사장이 레퍼토리 시즌제를 도입했던 2012년을 시작으로 매년 8월 말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약 300일간 전통 예술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24-2025 시즌에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향연’ ‘마당놀이’ 등의 인기 레퍼토리와 함께 신작 23편을 포함한 총 61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박인건 국립극장장은 “국립극장의 정체성인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동시대 창작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관객이 그리워하고 다시 보고 싶었던 공연을 오랜만에 다시 선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레퍼토리 시즌제는 안정적인 극장 제작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사전에 계획된 예산과 일정에 따라 작품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 관계자는 “예술가들에게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제공하고, 이는 작품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끼친다”면서 “무엇보다 극장은 시즌 티켓 판매를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매우 안정적인 제작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봤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은 관객들에겐 수준 높은 공연 제공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작품을 균형 있게 구성할 수 있어 관객들에게 폭넓은 선택권이 제공되고, 극장은 시즌제를 통해 관객 개발 및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 실제 국립극장이 최초 레퍼토리 시즌을 첫 도입했을 당시 2.5배가량의 관객 증가, 92%에 달하는 객석점유율을 달성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다만 장기적인 레퍼토리 시즌제 운영을 위한 과제도 남아 있다. 한 극장 관계자는 레퍼토리 선정의 기준이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관계자는 “보통 예술감독의 영향력이 깊게 관여될 수밖에 없는데, 감독이 교체될 때마다 레퍼토리도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극장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레퍼토리를 발굴해야 한다. 혹은 레퍼토리 시즌제 운영을 위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훌륭한 레퍼토리의 지속성을 위한 극장의 하드웨어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