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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추기경, 진해 벚꽃구경 간 날


입력 2009.02.19 14:21 수정        

<그리운 나라, 박정희>육영수 여사 강권에 함께 열차여행

국가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의 가까워질수없는 간극 확인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교구장으로 승품을 받은 후 1968년 6월 7일 청와대를 예방한 김수환 대주교 일행. “대통령에게 인사를 차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있고 마침 청와대에 학병 동기(

눈 감고 입 다문 모습의 감동

눈 감고 입 다문 평안한 모습에 스며 있는 또 한겹의 따뜻함, 그것은 사랑이리라.

TV에 비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 모습에서 사랑의 실체를 보면서 거기에 스며 있는 또 한겹의 가슴 시린 가르침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종교 울타리를 넘어 국가사회의 갈등과 고통을 사랑으로 녹여 안았던 지도자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동행한 모든 이에게 주는 가르침은 다름 아닌 화해,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인생이 유한하다는 생각의 답답함을 훌쩍 뛰어넘어 탁 트인 미지의 세상이 어렴풋 다가옴은 인간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와 더불어 흘러가는 역사의 강물을 타고 인생이 동행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인간의 자취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입과 눈을 아니볼 수 없었다.
입을 보면서 김 추기경의 아랫입술이 처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태어나면서 조국이 없었던 젊은이 김수환.

일본 죠치대(上智大) 유학중 학병(學兵)으로 끌려나갔다. 조선인 학병 중 누군가가 출정(出征)을 하게 되면 송별식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과 ‘도라지’였다고 한다. 가슴속 응어리를 품어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꾹 눌러 참고 그렇게 동기생의 송별식을 하다가 일본 기간 사병들에게 구타를 당해 입술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그 입술은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입은 그렇지만 눈은 남에게 줄 수 있어 좋았으리라. 그래서 두 눈의 각막을 떼어내 시각장애인 두 사람에게 하나씩―한 눈만 떠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감은 눈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과연, 그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고 하니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된다.

그 눈으로 본 세상은 참으로 모진 일이 많고도 많았으리라.

일본 유학 시절 학병으로 끌려나가 그렇게 입술을 다치고 출정을 해서 그가 겪은 전장(戰場)의 이야기를 아주 듣기 쉬운 말로 털어놓았었다. 아프고 끔찍하고 서럽기 이를데없는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 김수환의 참모습을 보면서 절감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시대 어른들을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추기경 서임을 받고 다시 1969년 7월 1일 청와대를 예방했다. 김 추기경은 천주교 산하 성심여고를 다닌 박근혜의 졸업식과 가톨릭의대 산업재해병원(현 평화방송, 평화신문 사옥) 개원식에 육영

‘성직자의 그릇’에 ‘인간 김수환’을 담은 책

속칭 ‘먹물’들은 ‘감동’이란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너무 흔히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그러한 사연을 알고는 그 입을 볼 때마다 거기에 눈길이 멈추고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박정희 시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김 추기경은 사람들이 자기 입을 주시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박 대통령을 직접 공격하거나 과격한 표현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없었다. 또 나름대로 지킨 원칙 중의 하나는 외국에 나가서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내 입을 주시하는 사람들과 언론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일인데 다퉈도 국내에서 다퉈야지 그걸 갖고 밖에서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김 추기경이 구술한 것을 평화신문 기자가 책으로 쓴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있는 대목이다.
한 시대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야 했던 ‘성직자의 그릇’에 또 하나 인간 김수환의 적나라한 모습이 담겨 있는 책이다.

이 책에 김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열차를 타고 진해까지 동행한 이야기가 나온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사연은 이렇다.
대통령은 진해를 좋아했다. 해마다 3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던 대통령은 특히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가면 그곳 공관에서 휴식을 즐기곤 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으레 가는 곳이 진해 앞바다 저도라는 섬이었고, 봄철이면 진해 공관의 벚꽃길을 산책하는 것이 국정 운영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큰 위안이었다.

1972년 4월, 대통령의 진해 일정을 알고 있는 육영수 여사는 천주교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통령을 모시고 왔다. 대통령과 천주교 지도자들 모두에게 예정에 없던 육 여사 주선의 만남이었다. 육 여사는 진해 벚꽃이 좋으니 함께 다녀오시라고 양쪽에게 권했고, 양쪽 모두 웃으면서 만나는 자리에 거절을 할 수 없어 그냥 동의를 했다.

위의 책에도 나와 있듯이 육 여사의 의도는 대통령과 천주교 지도자, 특히 김수환 추기경과의 껄끄럽고 불편한 사이를 좁혀 보려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퍼스트레이디로 처음 한 말이 “청와대의 야당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육 여사가 박종규 경호실장이나 이후락 정보부장 같은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대통령과 크게 싸우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기세로 덤비고 호소도 하던 것을 보아 대통령을 내조하는 ‘청와대의 야당’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육 여사의 주선으로 대통령과 추기경의 열차 동행은 이루어졌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였다. 무릇 열차 여행이란 무심한 나그네들끼리 산골 주막에서 만나 막걸리잔을 주고받게 하고 청춘 남녀를 더 가깝게 하는 스스럼없는 분위기가 있게 마련이건만, 대통령과 추기경의 자리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박 대통령 때문이었다.

1971년 12월 3일 서강대 과학관 준공식에 참석한 김 추기경(왼쪽)과 육영수 여사

평행을 달린 고행이 한국사회를 성숙시켰다

그분은 말할 기회를 좀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했다. 그래서 ‘오늘은 듣자. 어떤 분인지, 어떤 통치철학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자’고 마음먹고 거의 듣기만 했다. 기차가 천안 부근에 이르렀을 때이다.
“어이, 비서실장. 저것 봐! 나무가 없잖아. 저기가 어디야?”
“천안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저 뚝 좀 보십시오. 대한민국이 이래요!”
기차가 김천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교님, 여기가 무슨 역입니까?”
“아마 대신역일 겁니다.”
“아, 그래요. 쯧쯧…. 저 플라타너스는 전지(剪枝)를 하면 안되는데 저렇게 가지를 쳐버렸네요. 이봐 비서실장! 차장 불러서 저 전지를 누가 했는지 알아보라고 해.”


위의 책에 나와 있는 이 대목은 TV 생방송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의 머릿속은 그런 것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 그는 헬리콥터에서 국토를 내려다보면서 자기 그림을 그리듯이 국토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국가경영의 실체를 늘 확인하려 했고, “열차를 타고 가면서 국토를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백가지”라더니 최초의 끗발있는 경제사령탑에 백상(百想) 장기영을 발탁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장기영, 김학렬 부총리에다 정주영 회장 등 ‘말릴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들이 대한민국 열차를 맹렬히 질주시키던 때였으까.

진해로 가는 열차 안의 추기경을 놀라게 한 것은 그러나 열차의 맹렬한 질주가 아니었다. 철로변에 경찰들이 늘어서서 대통령 탑승 열차를 향해 일제히 경례를 올려붙이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경찰의 어느 누구는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적어도 대통령 박정희 그는 자기에게 향하는 과잉충성을 결코 달라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승용차가 철로 건널목을 지날 때 열차를 비정상적으로 정지시킨 일이 있어 노발대발했던 대통령 박정희에게,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이 철로변에 나와 있는 엄청난 시간 낭비와 국민 세금 낭비를, 물 한방울 아끼려고 청와대 변기 물통에 벽돌을 집어넣는 대통령에게 그게 어디 용납할 일이던가 말이다.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경찰의 누군가가 눈물 쏙 빠지도록 야단맞았을 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을 우울하게 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십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계획을 설명하더라”며―하긴 지금 이명박 정부가 중국과 일본이 우주로 가는 시대에 고작 4대강 강바닥을 파고 있기는 하다―대통령의 그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독재 체제로 갈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결국 김 추기경은 진해에 갔다가 이튿날 아침도 안먹고 상경해 버렸고, 육 여사의 의도는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75년 8월 14일 명동성당에서 김 추기경의 집전으로 거행된 고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미사. 종교의 진정한 사랑과 화해의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열차 동행에서 보듯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동시대 동행은 양쪽 모두에게 고행이었다. 정치와 종교, 박정희와 김수환 사이엔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이 선명히 존재했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 중에 김 추기경이 할 말을 다한 유일한 상대가 박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의 말이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정치사회적 동선(動線)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국정의 목표를 서민 대중에게 맞추어 고집스레 국부(國富) 창출에 진력했던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박정희 시대 18년을 관통한 “잘살아보세”라는 화두(話頭)와, 정치의 그늘을 지적하는 종교 지도자의 따끔한 충고는 다 같은 ‘인간 구원의 해법’임에도 끝없이 만나지 않고 달리는 평행의 철길 같은 것이었다.

종교가 교회 밖으로 나오는 것은 백퍼센트 정치 탓이다. 정치의 후진성이 초래하는 갈등과 마찰이다.

이제 다시는 종교와 정치가 크게 충돌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안겨주었던 고통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오랜 역사의 가난을 벗겨낸 물질적 토대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을 존재케 한 국가지도자의 공적 말고도 그 시대 정신적 지도자 김 추기경의 존재가 한국을 정치사회적으로 분명히 성숙시켰다는 점에서 두분에게 모두 감사 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함이다. 그것이 김 추기경의 사랑과 화해를 되새겨보는 지금 이 시대 우리 국민의 정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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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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