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보너스 군대´를 둘러싼 후버와 루스벨트의 대처
´원칙주의´는 무조건 옳고 ´포퓰리즘´은 무조건 나쁠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언론은 지속적으로 1930년대의 미국을 떠올리고 비교해왔다. 그 시절의 미국은 금융위기로 시작된 대공황의 시대였으며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해 뉴딜 정책을 펼쳐 위기 극복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
그 시대를 회고하는 칼럼들은 대부분 루스벨트의 전임인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우유부단함과 루스벨트의 과단성을 비교하며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의 상징으로 그 둘을 평가하고 있다. 당대의 평가도 그랬을까.
현재 우리는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도 뉴딜 정책에 비견되는 각종 정책들을 펼치면서 이른 시일 내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말부터 ‘입법전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법안들을 통과시키고자 혈안이 된 데는 루스벨트의 ‘100일 국회’를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 루스벨트의 100일 국회
루스벨트는 그의 뉴딜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취임한 3월부터 6월까지 100일간에 걸쳐 의회를 통해 놀라운 법령들을 제정했다. 그중에는 읽어보지도 않고 처리한 법안도 있었다. <미국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 것, 미국사>의 저자 케네스 데이비스에 따르면 루스벨트의 접근법은 ´방법을 정해서 실행해보고 실패하면 다른 방법을 쓰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그야말로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의회와 연방대법원과의 관계에 있어 기선을 제압해 그가 하려는 일을 뒷받침했다. 100일 의회의 마지막 회기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이 전국산업부흥법, 즉 뉴딜법의 통과였다. 기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된 이 법안은 엄청난 정부 개입과 통제를 수반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예전 같으면 꿈도 못꿀,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미국을 국민의 삶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정부로 변모시킨 일대 혁명이었다. 공화당 일색이었던 보수적인 월가의 사람들이나 기업인들은 루스벨트와 그의 뉴딜 정책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기미를 느꼈다.
루스벨트에 대한 보수진영의 반감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루스벨트와 그의 아내 엘리너에 대한 각종 악성 루머로 나타나 엘리너의 흑인 간통설, 유태계 자손설 등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악플’을 전부 모아놓은듯 했다.
허버트 후버는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자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의 원칙주의와 관련된 일화중 으뜸은 ‘보너스 군대’ 사건이었다.
1932년 대공황으로 미국 전역이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그 때 2만 5000여명의 사람들이 걷거나 화물기차를 타고 수도 워싱턴에 모여들었다. 무일푼의 이 유랑자 무리는 가족들과 함께 워싱턴에 버려진 집들을 무단 점거하거나 수도 남서부의 아나코스티아 강변을 따라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로 판자집을 만들어 야영지를 이루었다.
이들은 세계 1차대전 때 싸운 보병들로 대부분 퇴역병과 그의 가족들이었으며 1924년에 약속해 1945년에 지급하기로 돼있던 퇴역병들에 대한 ‘보너스’ 지급을 의회에 요청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스스로 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 약칭 BEF)라고 자칭한 이들을 사람들은 간단히 보너스 군대(Bonus Army)라 불렀다. 이들은 매일같이 대로를 행진하고 다녔다.
이들이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게 된데는 사실 그 근원이 독립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대에서의 소득과 사회에 남아있었을 때의 소득의 차이를 보상해준다는 의미의 이 제도는 독립전쟁 때부터 시행된 것으로 이러한 전통이 계속돼오다 미-스페인 전쟁 때부터 끊기게 되는데 결국 1차 대전에 참가한 병사들에 이르러 그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보너스군대의 워싱턴 점령과 후버의 원칙주의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큰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전후 1인당 60달러의 보너스가 지급되자 터무니 없이 적은 액수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고 그에 따라 재향군인회가 나서 그 압력으로 1924년 미 하원이 추가 보너스 지급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1인당 최대 500달러로 총 360만명이 넘다보니 정부로서는 신탁기금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이자까지 합쳐 퇴역병들에게 지급할 액수가 모이기까지 총 20년, 즉 1945년에 지급하기로 한 것. 그러나 대공황으로 인해 생계가 절박해지자 1932년 그 자신 퇴역병 출신인 라이트 패트먼 하원의원이 즉시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이 소식을 들은 퇴역병들이 워싱턴으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원칙주의자인 후버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자신도 당시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정부 재정을 ‘보너스’ 지급을 위해 쏟아붓는 것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의회도, 사법부도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는 이 유랑자 무리들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원했다. 패트먼의 법안은 하원은 통과했지만 상원은 이를 부결시켰다. 언론은 이들이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고 공산혁명을 기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 시 경찰은 보너스 군대 해산에 나섰다. 시 경찰은 폭력 사태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후버 정부는 단기간에 해산시키길 요구했다. 급기야 경찰과 보너스 군대간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이 와중에 겁먹은 경찰관 한명이 총을 쏘는 바람에 퇴역병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돌변하자 후버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진압명령을 내렸고 맥아더는 그의 부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패튼 소령의 지휘하에 있는 제3기병대에 명령해 탱크를 동원,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판자집을 쓸어버리고 불살라버렸다. 이 여파로 1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주요인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버는 그 해 선거에서 루스벨트에 패하고 만다. 후버에 의해 워싱턴에서 쫓겨난 보너스 군대도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자 워싱턴으로 돌아온다. 루스벨트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그 역시 보너스 조기 지급에 대해서는 반대였지만 아내 엘리너를 그들에게 보내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커피도 실컷 마시게 해주라고 당부했다. 엘리너는 그들과 어울리며 함께 노래도 불렀다. 루스벨트는 그들에게 공공건설 일자리를 주었다.
누군가에게라도 위로 받고 싶은 ‘전쟁의 시대’
지난 한주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과 그를 추모하는 군중의 모습을 담은 뉴스가 온나라를 뒤덮었다. 언론은 추기경을 추모하는 기나긴 행렬에 가톨릭 국가들마저 의아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십만의 군중은 종교도 이념도 세대도 계층도 서로 달랐다. 추기경의 생전 행적을 비판하는 일부의 목소리는 곧이어 그에 분노하는 다른 목소리에 덮여 ‘소리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위로받고 싶었다. ‘전쟁의 시대’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가슴을 묻고 아무말 없이 서로를 보듬어주는 그런 손길과 눈길과 마음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생전에도 그러했지만 선종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그런 위무의 어루만짐을 보여주었다.
용산의 한 상가에서는 한쪽에서는 화염병와 새총으로, 한쪽에서는 물대포로 대치하다가 총 6명이 숨졌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한쪽에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강행하고 한쪽에서는 문을 해머로 부수고 막는 ‘입법전쟁’이 2차로 예고돼 있고, 서해안에서는 남쪽을 향한 북측의 구경 100mm 해안포가 위장막을 젖힌 채 정조준중이며 함정들은 비상상황에 대처하고 있고, 미국발 중국발 일본발 동유럽발...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질지도 모를 경제위기의 연쇄 도미노에 언제 직장에서 내쫓길지 모르는 ‘생존 전쟁’이 오늘 하루도 펼쳐지고 있다.
그 당시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자했던 ‘원칙주의자’ 후버와 ‘사회주의자’로 비난받았던 루스벨트, 후대에 이르러 대공황을 야기한 후버와 뉴딜로 극복의 길을 열었다는 루스벨트라고 평가받는 그 두사람의 예에서 이명박 정부가 취해야할 교훈은 무엇일까. ‘보너스 군대’의 한 퇴역병은 이런 말을 남겼다.
“후버는 우리에게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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