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적 순도 매우 높고 운동권 규모 급격히 커져
‘우호적 대중’ 포함한 넓은 운동권 ‘풀’이 형성
운동권 문화, 사회로 진출로 범사회적 확산
경력 쌓임에 따라 해당 분야 영향력 매우 커져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는 마은혁 판사의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 경력,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 등이 너무 많은 점 등이 포함된다. 필자는 그들이 청년 학생 시절이었던 80년대 운동권의 동향을 통해 사법부의 정치 편향성에 우회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그들의 나이다. 마은혁 판사를 포함해 헌법재판관 9인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모두 1960년대생, 학번으로 치면 80년대 학번이다. 그중에서도 80년대 중후반 학번에 집중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문형배(1970년생)·이미선(1970년)·김형두(1965)·정정미(1969)· 정형식(1961)·김복형(1968)·정계선(1969)·조한창(1965)·마은혁(1963)이다.
세대는 시대적 상황과 집단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법이다. 1960년대생은 1980년대 20대의 나이로 광주 5.18과 87년 6월항쟁과 만나면서 독특한 경험과 신념 체계를 가졌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념적 순도가 매우 높고 운동권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6월항쟁은 김영삼·김대중 씨가 전체 상황을 주도하는 가운데 소수의 조직화한 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이끌었고 다수 대중은 학생들에 호응하는 양상이었다. 덕분에 운동적 경험과 급진이념은 서울대·연·고대 등 서울의 명문대에 집중되었다.
6월항쟁 이후 운동이 대중화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급진이념이 다수의 대중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대학은 해방구에 가까웠고 금기시되었던 이념 서적 출판이 봇물이 터지듯 했다. 이를 배경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이념화된 대학생 집단이 대규모로 출현한다.
마은혁 재판관은 인민노련 출신으로 청년 시절 맔스레닌주의자였다. 주사파의 경우 매년 5월경 개최되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범식에 연인원 5~10만명 정도가 참가했는데 이 중 10% 정도만 주사파 또는 급진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그 숫자는 (편의상) 5만명*10%*10년(87년~97년)=5만명 정도가 된다.
둘째는 소수의 운동권을 넘어 이른바 ‘우호적 대중’까지를 포함한 보다 넓은 운동권 ‘풀’이 형성되었다.
운동권의 권위가 높아지고 운동권에 대한 다수 대중의 지지가 폭넓게 형성되었다. 6월항쟁 시기에도 학생 다수가 운동권을 심정적으로 지지했지만, 운동의 구성은 소수의 조직화한 운동권과 다수 대중이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반면 6월항쟁 이후에는 해방공간이 된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다수 대중이 운동권 사상과 문화에 깊이 포섭되어 ‘조직화한 운동권’+‘우호적 대중’으로 구성된 폭넓은 운동권 풀이 형성된다.
정계선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정계선은 87년 ‘전태일 평전’을 읽고 진로를 바꿔 88년 서울 법대에 진학해 운동권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계선이 어느 정도 운동권에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으로 봐 그가 넓은 의미의 운동권 풀에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셋째는 운동권 문화에 젖었던 다수 학생이 사회로 진출하면서 운동권 문화가 범사회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기성세대의 반발이 매우 약하여 운동권 또는 운동권 문화에 젖어 있던 학생들이 사회진출 과정에서 학생 시절 가졌던 이념적 편향성을 그대로 가진 채 사회로 진출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성세대 특히 공안 기관들이 86 운동권의 민주화운동을 과도하게 탄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주체사상이나 맑스레닌주의와 같은 급진주의가 공공연히 대학가에 범람하지만, 기성세대가 이를 너그럽게 포용하거나 결과적으로 묵인했다.
법조계로 진출할 때 운동권은 초기에는 주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판사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여 ‘우리법연구회’라는 써클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2022년 경찰에서 집단행동을 주도한 류삼영이나 해병대 출신 박정훈 대령 등도 비슷한 사례이다.
넷째는 사회진출 경로이다. 50~6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주로 농민운동·농촌에 관심이 많았고 70년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 현장에 진출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노동 현장이 중시된 것은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로 보는 맑스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6월항쟁 이후 운동이 대중화되자 이른바 주사파·NL은 새로운 사회진출 경로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국적 사회진출’이다. 맑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에 따르면 사무직 인텔리나 중산층은 기회주의적인 동요 집단이다. 덕분에 교사·법조인 등 기존 질서에 편입된 다수 학생은 운동권에 대한 강한 부채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애국적 사회진출’은 사무직 인텔리, 기존 제도권 질서에 합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거기서 활동을 적극화하는 것이 옳다고 격려했다. 이에 따라 운동권 풀에 소속되어 있었던 급진이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다수 학생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운동권 물은 먹은 학생이 사회로 진출하여 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국적 사회진출의 하나로 의식적으로 판사·교사·언론인이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임에 따라 해당 분야에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정치권이다. 22대 국회에 국가보안법 전력자가 무려 24명에 달하고(이학영·김민석·김윤덕·정청래·서영교·진성준 등) 이들 다수는 민주당 내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헌재(헌법재판소)도 우리법연구회가 전체 판사의 “5% 수준인데 헌법재판관 비율에서 9명 중 4명일 정도로”로 조직화·세력화 되어 있다.
1920년대 3.1운동 이후 소련 사회주의의 성립, 일본의 문화정치를 배경으로 민족주의는 물론 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출몰했다. 그리고 이들 세대는 20대가 된 45~53년 해방공간에서 사회활동을 급진이념의 저수지가 된다.
그와 비슷한 일이 2020년대에 벌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급진이념을 수용했던 1960년대생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최고 엘리트 집단인 판사 그것도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이 되어 한국 정치의 운명을 좌우하는 판결하게 된 것이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