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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왜 천도교를 적극 도왔을까


입력 2009.03.03 17:22 수정        

<그리운 나라, 박정희>김관희 전 천도교종학대학원장의 추억

최제우 동상- 손병희 동상-수운회관 건립 등에 정부 재정지원

대학 시절 처음 만난 박정희 의장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50대의 건강미에 늘 미소를 띤 표정, 그리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주변에 활기를 부여하는 사람.

전 천도교종학대학원장 김관희 씨(68)를 일컫는 말이다. 30여년을 민족종교 천도교에 파묻혀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과 역사정신을 현대생활에 구현시키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정진해 온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의 창설 멤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도교와 박정희 대통령의 접점(接點)에서 자기 인생의 좌표를 그려 왔다고 말한다.

2월 26일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인 수운회관내 그의 집무실과, 28일 3.1독립운동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두차례에 걸쳐 만났다.

천도교 지도자이자 ‘박정희 매니아’인 그는 ‘천도교 안의 박정희 사람’으로 불린다.

제90주년 3.1절을 맞아 천도교에서 보는 박 대통령, 그 인연과 교감(交感)의 역사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김관희씨와 박 대통령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건국대 축산대학에 다닐 때 박정희 의장을 처음 보았죠. 5.16 직후 한신 내무장관과 함께 오셨더라구요.”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리던 당시 사립대학에 정원 외의 부정 입학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대 축산대학만큼은 소수 정예로 축산영농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특수 목적에 따라 장학금과 덴마크 연수 등 학생들에게 폭넓은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박 의장이 직접 왔던 것.

“축산대 학생들이 쇠똥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부터가 달라 보인 거죠. 자급사료 재배라든지 젖소 사육에 땀 흘리는 현장을 보시고 무척 흐뭇하셨던 모양입니다. 사립대에 부정이 많아 혁명정부가 학생수를 줄이라고 엄명하던 때에 우리 축산대생은 60명밖에 안되는 것을 알고 100명으로 늘리라고 지시하더군요.”

박정희 혁명정부가 가장 고심했던 것은 전기가 없고 초가집투성이인 농촌대책이었다. 농어촌고리채 정리 등 혁명정부 초기부터 시행한 농촌 중점의 정책에 따라 박 의장의 지방시찰도 농업 관련 문제가 많았다.

김관희씨는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열린 농대생 농업토론회에 학교 대표로 참석했다가 농대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찾아온 박 의장을 다시 만났다.

그때 박 의장과 악수를 나누며 그가 들은 말은 “우리는 배가 고프다. 농업이 살아야 해. 그대들이 농촌을 일으켜 달라”는 아주 절박한 호소였다.

육여사 피격 후에도 독립유공자 위로한 ‘무서운 자제력’

그는 대학 졸업 후 농학자 유달영 선생을 모시고 다녔고, 유달영 선생과 호형호제하던 구상 시인과의 만남도 자연히 이루어졌다.

그가 들려주는 구상 시인의 말.

“박정희 대통령은 공부를 엄청 한 사람이다. 역사탐구를 많이 했지. 다른 대통령들과 급이 달라.”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 등을 포함한 임진왜란 유적과, 유관순, 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 유적 등이 정비되고 복원된 것은 박 대통령의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의 계승의지를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예우하고 각종의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 지원했다.

소위 ‘안티 세력’은 항일운동에 대한 박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을 “일제시대의 만주군 경력을 희석시키기 위해, 또는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비틀어대지만, 김관희씨는 이에 대해 “군소리에 불과하다”며 일소에 붙인다.

“박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아요? 육 여사가 피격당해 업혀 나갔을 때 중단됐던 연설을 마치고 나서 육 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챙겼죠. 그 다음 어디로 간 줄 알아요? 공식 일정대로 독립유공자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간 겁니다. 그런 분이에요. 그 경황에 그 무서운 자제력을 상상해 보세요.”

그의 표정에 경외감이 짙게 깔린다.

그토록 독립운동을 챙기는 것과 달리 한일협정 후 들여온 대일청구권 자금은 독립유공자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포항제철 건설 등 산업현장에 쏟아부었다. 독립유공자들의 반발도 국가 지도자의 산업국가 건설을 위한 결단을 흔들지는 못했다.

박 대통령은 앞서 1965년 6월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하여 발표한 담화문에서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 손으로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라고 역설했다.

확고한 통치철학과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해석과 국가의 정통성은 정치논리로 재단되고 변질되었다.

문민정부를 자칭한 김영삼 정부 때는 3.1독립운동→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의 맥락을 강조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취임 직후 3.1절 기념식에서 “우리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고 말했다.

국가와 국민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소수 정치세력의 명분을 합리화하는 역사관으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근대화 과정을 부인하고 있다. 전쟁과 가난 등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선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명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역사관은 “다른 대통령들과 급이 다르다”는 말이 아주 여실하게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교단으로부터 배척당한 최덕신 일화

김관희 씨가 천도교에 입문한 것은 1974년. 역사책에서 본 동학에 마음이 끌려 그해 여름 천도교 대구시 교구를 찾아갔고, 수운 최제우의 성지인 경주 구미산 용담에도 가보았다.

그가 인적 드문 황톳길을 걸어 수운의 득도처인 용담정(龍潭亭)에 다다르니 웬일로 멀끔한 신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있어 그곳 사람에게 물으니 박 대통령이 보낸 청와대 비서관들이라 했다.

대통령의 지시로 민족종교의 성지 조성 작업이 진행되던 때였다.

박 대통령은 동학농민혁명, 3.1독립선언 등 역사적 거사를 담당하며 민족정신을 오롯이 지켜온 천도교에 관심이 컸다. “대한민국은 천도교에 큰 빚을 졌다”는 말을 자주 했던 박 대통령은 용담성지를 경주국립공원에 편입시키도록 지시하고, 1975년 10월 용담정의 준공과 때를 맞춰 용담성지의 정문인 포덕문(布德門)과 중문인 성화문(聖化門), 용담수도원의 편액 글씨도 직접 썼다.

그뿐만 아니다. 앞서 1964년에는 대구 달성공원에 최제우 동상이 세워지고 김현철 대통령 고문 편에 금일봉이 전달되었다. 1966년 손병희 동상이 서울 탑골공원에 세워질 때에도 이효상 국회의장 편에 건립기금이 전달되었으며, 1971년 천도교 수운회관도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동학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천도교를 도와주신 게 아니죠. 종교에 관한 한 가슴이 열린 분입니다. 다만 천도교는 민족정신의 표본이며 산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관희 씨는 박 대통령이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닌 적이 있고, 육영수 여사는 불교신자였으며 근혜, 근영 자매는 천주교 세례를 받은 사실을 들어, 대통령의 천도교 지원은 민족종교 육성과 역사 복원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천도교에서는 박 대통령의 도움으로 천도교가 살아났다며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그러나 1968년 교인 100만명을 자랑했던 교세가 2009년 현재 10만명이 안되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천도교의 약세화에는 전 교령 최덕신과 오익제의 월북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덕신은 육군 중장 예편, 한국전쟁 정전회담 대표와 유엔총회 수석대표, 서독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천도교 집안이므로 교단이 그의 영입을 원하고 박 대통령의 권유도 있어 교령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답게 수운회관을 건립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 수협중앙회가 건물에 입주하는 등 외형적 성과는 볼 만했지만, 세력 과시에 치중하거나 천도교와 관련 없는 군시절의 부하를 데려오는 등 최고 지도자로서의 신앙적 책무를 외면한 독선과 전횡으로 교단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김관희씨가 그때의 일화를 전해준다.

“수운회관 앞에 붓글씨를 대필해 주는 대서소가 있었어요. 거기서 박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어요. 직접 찾아가기보다는 정중한 예를 갖춘 셈이지요. 각하가 권유해서 왔다가 쫓겨나게 됐으니 도와 달라는 호소였는데, 박 대통령 대답이 교단의 일은 교단에서 해결하라고 했답니다.”

결국 그는 해외로 유랑의 길을 떠나 박정희 정부에 등을 돌리더니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3.1정신의 아이콘은 ‘운동’이 아닌 ‘혁명’

교세의 약화로 하여 천도교 역사가 퇴색되어서는 안될 것이로되 3.1독립선언을 주도했던 1919년 2천만 동포 시대에 교인이 3백만을 헤아렸다 하니 세월의 무상함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1세 교조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이 2세 최시형을 거쳐 3세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선포되던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험한 세월을 헤치며 들불처럼 번졌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내천(人乃天), 시천주(侍天主)로 일컬어지는 평등사상이라고 김관희씨는 말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 즉 한울님이라는 절대자의 존재가 초월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몸 속에 모시고 있으니 양반과 천민, 상전과 머슴이 따로 없이 모두가 귀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이다.

최제우를 동시대의 미국 대통령 링컨과 마주 세우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최제우가 링컨보다 수년 앞서 여자 노비 2명을 해방해 각각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2세 교조 최시형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화전(火田)을 부치던 미천한 빈민층 출신이라는 사실은 인내천, 시천주의 종지(宗旨)가 실천적 사상임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때는 소수의 양반계급을 제외하고 백성 대다수가 상민이나 천민이었죠. 양반과 상놈이 따로 없다는 외침이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교인수가 급속한 팽창을 이룬 겁니다.”

인간해방의 혁명적 선언이 조선팔도를 휩쓸었다고 김관희씨는 말한다.

혁명은 기존 질서를 깨는 것이다. 동학의 외침은 봉건왕조의 신분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1세, 2세 교조의 참형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들불은 계속 타올랐다. 동서의 외세 앞에 속절없이 기울어가는 국운에 저항하여 갑오동학혁명으로 이어지고, 기어이 나라 잃은 백성의 신세로 전락하고서는 더욱 무서운 기세의 민족주의 불길로 타올랐으니 그것이 3.1독립선언이었다.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에요. 나라 잃은 백성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민족주의 혁명이며 최대의 자주적 독립혁명입니다.”

인간혁명을 선언한 동학의 창도 이후 동학혁명, 3.1혁명까지 기울어가던 국운과 망국의 비운을 부둥켜안고 달려온 혁명의 세월이었다고 김관희씨는 말한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또다른 인간구원의 혁명인 5.16으로 이어지더라는 것.

3.1혁명은 그가 말하는 천도교와 박정희의 접점 부분이다.

박 대통령이 보는 3.1정신이 어떤지를 기록에 찾아보니 이렇게 되어 있다.

“근대사상 최초로 지위, 빈부, 당파,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모두가 운명 공동체로서 일체감을 가지고 국난 극복을 위해 일치 단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 만세를 우렁차게 외치면서 일제의 폭압 속에서 마멸되어가던 민족의 자아를 크게 각성시켰던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서 3.1정신이야말로 격동의 70년대에 사는 우리들의 반드시 이어받아야 할 귀중한 정신사적 유산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산은 안정과 번영, 그리고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들이 반드시 정신 생활의 지표로 삼아야 할 민족사관의 커다란 대들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1973년 3.1절 기념사

3.1정신에서 발견되는 두가지 키워드가 있다. 민족과 독립이다.

한편 5.16 직후 미 CIA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 5.16 주체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 부분이 있다.

“이제까지 미국이 접촉해온 한국의 민간인들이나 한국군 고위장성들과 다르며 아주 새롭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이어서 미국의 영향력 행사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이 쿠데타 세력의 동기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강력한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이다. 3.1정신의 키워드가 5.16의 정신적 동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꼭 필요한 인물은 하늘이 보내준다

2월 28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재조명’ 제하의 제90주년 3.1독립운동기념 학술회의에서는 3.1절의 역사왜곡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았다.

3.1절 기념행사가 만세시위만을 재현하고 있고, 그것도 조직과 준비 없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유관순이 3월 1일에 등장하여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처럼 언론이 보도하는 등 오류가 빈번하다는 것.

지난 3월 1일 90주년 기념행사를 TV로 보니 민족대표 33인은 없고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만을 재현하면서 그 옆에 있는 손병희 동상도 비추지 않았다.

그 동상을 세우던 1966년 제막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의 선각자요 민족자주 정신의 구현자로서 그리고 3.1독립운동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청사에 길이 빛날 위인이시다”라고 추모했던 민족 지도자 손병희.

3.1혁명은 천도교가 조선팔도를 풍미하던 교세를 바탕으로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자금을 전담하고 조직을 대거 동원하여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연출한 민족 거사였다.

손병희가 빠지고 천도교가 빠진 3.1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수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3.1혁명 거사의 마무리가 상해임시정부 조직화로 이어지고 그것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법통이다. 그러니까 3.1혁명이 없었으면 상해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는 식의 이야기가 된다.

3.1혁명의 모태(母胎)는 동학이다. 동학이 없었으면 3.1혁명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김관희씨는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이 동학의 연장이며, 동학의 마지막 꿈을 이룰 것이라고 했죠.”

‘동학의 마지막 꿈’은 어떤 것일까.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박정희 지음 <국가와 혁명과 나>)

그 꿈을 헤아려 봄직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박 대통령의 평생을 따라다닌 과제가 자주독립입니다. 남에게 눌려 살지 않고 얻어먹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독립 아닙니까. 내가 그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박 대통령의 부친(박성빈)이 경상도 성주의 동학 접주(接主)였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부친은 조선 말기의 폭정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나왔으며, 그래서 모친이 어린아들 박정희에게 “그때 아버지가 죽었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역사에 없을 뻔했지만 고난의 역사에는 꼭 필요한 인물을 하늘이 보내주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 박정희 같은 인물은 하늘이 보내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관조(觀照)해 보는 역사에서 얻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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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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