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방 뒷이야기 공개, 만화 ‘땡땡’ 보고 불어 공부도
“제가 햇빛을 몰고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It is rumored that I brought the sunshine.)”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일 영국을 국빈방문했을 당시 공식환영식을 참석하던 때의 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려 ‘지상 최대의 의전’이라던 공식환영식에 대한 우려와 궁금함이 쏟아졌고 기자실 내에서는 “만약 비가 그치지 않으면 마차가 바뀌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도 잠깐. 공식환영식이 시작하기 직전 언제 그랬냐는 듯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햇볕이 나왔다. 이에 박 대통령이 왕실 영예수행 의전관 후드 자작에게 이같은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청와대가 10일, 지난 2일부터 9일까지 6박8일 서유럽 순방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이 현지에서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공개해 눈길을 모았다.
첫 순방지인 프랑스 파리에서는 지난 3일 오르세 미술관 방문 당시 “미술관 내 소파, 조명 등 또한 브라질 출신의 한 형제가 디자인한 것”이란 설명을 듣고 박 대통령이 “미술관의 명성에 걸맞게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게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 19세기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던 박 대통령이 위층을 둘러보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하자 고장은 멈춰 있었던 것.
당황한 박물관 측이 “오래된 시설이라 고장이 잦다”며 거듭 사과하자 박 대통령은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에스컬레이터가 잘 작동해도 서 있지 않고 일부러 걸어서 올라간다. 전혀 문제가 없다”고 웃으며 넘겼다.
4일 프랑수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의 한·프 정상회담 때는 박 대통령이 ‘외유내강’을 언급하며 “올랑드 대통령이 과거 사회당 총재로 있었을 때 특정 사안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이 총재실로 항의하러 갔다가 올랑드 대통령의 친근한 태동에 감명 받아 편한 얼굴로 나왔다고 들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올랑드 대통령은 놀라면서 “오래 전 일인데도 기억해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프랑스 공식 방문 마지막 일정인 4일 장 마크 에로 프랑스 총리 주최 만찬에서는 박 대통령이 와인으로 건배하는 에로 총리 등에게 “왜 와인을 마실 때 잔을 부딪치는 줄 아느냐”면서 “포도주를 마실 때 아름다운 색과 빛을 보면 눈이 즐겁고, 향을 맡으면 코가 즐거운데, 귀엔 즐거울 게 없어서 잔을 부딪치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고 소개해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했다고 한다.
“여왕의 본드 걸, 인상 깊었다”
영국 국빈방문에서도 소소한 에피소드가 많이 소개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의 면담에서 여왕이 박 대통령에게 “몇 살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은 “22세 때 모친(육영수 여사)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에 여왕도 “나도 25세 때 선왕이 돌아가셔서 여왕을 맡게 됐다”면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일을 경험한데 대한 동병상련의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본그 걸’ 역할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 당시 여왕이 영화 ‘007’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파트너인 ‘본드 걸’ 역할을 맡은데 대해 박 대통령이 “전 세계인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다”고 호평했다.
이에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요크 공작)는 “여왕이 ‘본드 걸’ 역할을 친히 수락했다”며 “여왕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영국 국민이 왕실을 매우 성숙된 자세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답했다. 또한 앤드루 왕자는 “여왕의 ‘본드 걸’ 배역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되돌려(rewind) 찾아본 동영상”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여왕 역시 5일 국빈만찬에서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내가 그런 역할을 할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본드 역할을 하는 배우가 왕궁을 출입하고, 또 궁에 시종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졌던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의 발달된 조선 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여왕의 3남 에드워드 왕자(웨섹스 백작)는 한국의 발달된 조선 산업을 평가하면서 “한국 기업에 배를 발주하면서 2년에 1척씩 선박을 인도받으려 했으나, 해당 기업은 2년 반 만에 전부 다 인도하겠다고 해 놀랐다”고 말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지난 1971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영국 측으로부터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차관 지원 요청을 거절당하자 뒷면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던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면서 ‘우리 민족은 오래 전에 이런 배를 건조했었다’고 했다는 일화를 거론하면서 “한국의 조선 산업은 그 후에도 많은 발전을 해왔다(We've come a long way since then)”고 답했다.
지난 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방문시에는 평소 정치적 ‘롤 모델’ 가운데 한 명으로 꼽고 있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무덤을 둘러보기도 했다. 특히 사원 주임사제로부터 “여왕 동상의 얼굴이 실제 여왕이 사망했을 당시의 안면상(death mask)”란 설명을 듣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특히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메리 1세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나란히 안장돼 있는 것을 보고는 “두 여왕이 함께 묻힌 게 인상 깊다”고 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어려서부터 많은 고난을 겪어서 사려가 깊고 신중하며 공정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방문에 앞서 영국 국방부 인근 임뱅크먼트 가든에서 열린 영국 최초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기공식에 영국 왕위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이 참석하자, 박 대통령은 “왕실이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영국 국민이 왕실을 더 존경한다”며 “최근 태어난 조지 왕자도 훌륭히 성장해 왕실의 전통을 잘 계승하길 기원한다”고 덕담을 나눴다.
윌리엄 왕세손이 외국 정상의 국빈 행사 때 영국 여왕을 대신해 참석한 것은 이번 기공식이 처음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6일 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오찬장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국가를 최우선시(put country above all else)하는 두 여성 지도자가 마주보도록 자리를 준비했다”고 재치 있게 설명키도 했다.
특히 캐머런 총리는 박 대통령이 여왕 주최 국빈만찬 때 영어로 한 답사에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 “우리의 미래는 별을 보고 바랄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It is not in the stars to hold our future, but in ourselves)”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해당 구절을 처음 들어봤다”면서 “아주 마음에 든다. 앞으로 연설 때 자주 인용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박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에 앞서 지난여름부터 박 대통령의 숙소로 사용된 버킹엄궁 내 ‘벨지언 스위트(Belgian Suite)’에 보수작업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여왕은 박 대통령과 함께 버킹엄궁에서 묵은 일부 공식수행원들의 방 배정과 공식 환영식 뒤 박 대통령 등의 왕실 마차 탑승 방식도 직접 결정했으며, 박 대통령의 동선에 따라 궁내에 전시된 한국 관련 왕실 소장품도 직접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왕실은 박 대통령에 대한 국빈만찬에 빅토리아 여왕 등 역대 왕조들이 사용했던 100~200년 역사의 식기들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벨기에 만화 ‘땡땡’보면서 프랑스어 익혀”
벨기에 방문에서는 만화 ‘땡땡’이 화제가 됐다.
지난 7일 필립 벨기에 국왕 주최 만찬에서 필립 국왕이 박 대통령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의 비결을 묻자 박 대통령이 “벨기에 만화인 ‘땡땡’을 즐겨보면서 프랑스어를 익혔다”고 소개했다고 한다. 필립 국왕이 “땡땡 전집을 다 봤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은 “전집을 갖고 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7일 에그몽궁에서 열린 벨기에 방문 공식 환영식 당시, 박 대통령은 엘리오 디 루포 벨기에 총리가 늘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녀 ‘미스터 나비넥타이(Monsieur Papillon)’라고 불리는데 착안해 각양각색의 나비넥타이를 선물했다고 한다.
황당한 일도 있었다. 한·벨기에 정상회담 도중 우리 측 의전선도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사가 개인 사정을 이유로 무단이탈하자 예비 운전사를 확보하지 못했던 벨기에 측에선 여성인 외교부 의전과장을 대리 투입하기도 했다. 벨기에 외교부 의전과장은 이후 필립 국왕 주최 만찬 때까지 차량을 운전했다고 한다.
8일 박 대통령과 헤르만 반 롬퓌이 유럽연합(EU)상임회의 의장 및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집행위원장 간의 한·EU 정상회담 당시 의전을 담당한 벨기에 출신 EU 이사회 의전관은 박 대통령이 벨기에 국민이 선호하는 파스텔 톤 의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즉석에서 회담 전 사진 촬영 장소를 벨기에 화가가 그린 파스텔 톤 그림 옆으로 바꿨다고 한다.
해당 그림은 “벨기에 출신의 롬퓌이 의장이 가장 아끼는 것”이란 게 이 의전관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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