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연패 이충희 감독 '꿈, 그리고 악몽'
2007-08 시즌 대구 오리온스 시절과 판박이
불운 치부하기엔 보여준 지도력에도 의문
원주 동부 이충희 감독은 선수시절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슈터이자 한국농구의 레전드라는 칭호를 붙여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발자취는 정반대다. 이충희 감독의 현역시절이 선수들의 롤 모델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라면, 감독으로서의 인생은 그야말로 '악몽'이다. 국내 프로스포츠 통틀어도 스타 출신 지도자가 반드시 훌륭한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속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에 가깝다.
이충희 감독이 이끄는 동부는 최근 11연패에 빠졌다. 동부 전신인 TG 삼보와 나래 시절을 통틀어서 역대 최다연패 기록(종전 9연패)을 벌써 두 경기나 경신했다. 김주성, 이승준, 두경민 등을 앞세워 4강 이상의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것과는 역주행하는 양상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충희 감독에게는 이런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동부의 현 주소는 이충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2007-08시즌의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와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당시 플레이오프 대표 단골손님이자 공격농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리온스는 SK로 떠난 김진 감독의 뒤를 이어 이충희 감독을 신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오리온스는 개막 2연승으로 반짝했으나 대표적인 간판스타 김승현의 허리부상을 기점으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주축들의 줄부상이 도미노처럼 겹쳤고, 연패기간 매 경기 평균 점수 차가 15점 이상에 이를 만큼 공격과 수비가 모두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양상을 보였다.
오리온스는 이충희 감독 체제에서 4승 22패(승률 0.154)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겼고, 이충희 감독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취임 7개월 만에 경질됐다. 해임 당시 끝내 4승 고지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나 11연패 수렁에 빠져있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오리온스 시절은 이충희 감독의 지도자 경력에도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이후 이충희 감독은 동부 감독으로 다시 복귀하기까지 5년간 야인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사실 오리온스 시절을 제외하고도 이충희 감독의 지도자 인생은 대체로 순탄하지 못했다. 선수로서 은퇴하고 처음 지도자에 입문한 대만 프로농구에서 우승을 이끌고, 1997-98시즌 당시 신생팀 경남 LG(현 창원)를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듯했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운이 따르지 않았던 점도 분명히 있지만, 단순히 불운으로 치부하기에는 이충희 감독이 보여준 능력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오리온스나 동부는 이충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기 전부터 최소한 플레이오프는 단골로 나가던 팀이었고 하위권을 다툴 전력은 아니었다.
김승현-김주성 같은 핵심선수들의 부상공백을 감안해도 툭하면 연패에 허덕일 만큼 부실한 위기관리 능력과 플랜B 부재는 외부요소만을 탓할 수 없는 대목이다. 11연패 수렁에 빠진 19일 전자랜드전에서도 막판 선수들의 체력안배 실패와 잇단 실책, 컨디션이 좋지 않은 주전들을 무리하게 투입한 전술적 패착 등 이충희 감독의 능력에 대한 의문부호만 더 깊게 만들었다.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역주행하는 이충희 감독의 행보는 현역 시절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후배 허재 감독과 비교해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허재 감독은 2005년 KCC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래 8년째 한 팀의 지휘봉을 잡으며 KBL의 대표적인 장수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챔프전에서 2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차지했고 프로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이룬 첫 번째 케이스에 이름을 올리며 지도자로서도 성공한 반열에 접어들었다.
이충희 감독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이번주만 해도 22일 부산 KT, 24일 서울 SK 등 선두권 팀을 만난다. 부상 중인 김주성이 연말에 복귀하고 내년 2월에는 상무에서 제대하는 윤호영까지 가세하면 다시 한 번 전력을 추스를 수 있지만, 문제는 그때까지 연패를 끊고 잃어버린 지도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동부에서도 이대로 무너진다면 이충희 감독의 지도자 인생은 사실상 회생이 어려워진다. 이미 감독의 경질을 요구하는 팬들의 성화가 거세진 가운데 이충희 감독은 농구인생 통틀어 최대의 고비에 직면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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