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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정의롭다" 복거일의 정면돌파


입력 2014.03.15 09:58 수정 2014.03.15 09:58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서평>빛나는 통찰 깊이있는 문장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복거일 저 기파랑 간.
책을 보며 짜릿한 지적(知的) 세례를 받는 느낌까지 갖는 건 흔한 체험이 아니다. 시야가 넓어지고, 통찰까지 얻은 덕에 세상과 사회를 보는 눈은 유연해지고, 원칙 면에선 좀 더 분명해질 것으로 스스로 믿고 있다. 작가 복거일의 책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기파랑)는 그렇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생각과 처방이 달라 갈등과 분란이 하늘까지 닿은 이 시대, 독자가 책 한 권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거의 다 누린 셈이다.

묘했다. 복거일이 펴낸 소설, 평론집 등 수십 권 중 이 책의 비중이 특별한 건 아니다. 저자의 고백대로 이 책은 예전 펴냈던 그의 책에서 발췌해 새로 엮었다. 그래서 체계가 잡힌 저술은 아니며, 최근 발표했던 사회평론 성격의 글 모음집이다. 선보인 지 2년여이니 시차도 있을 법한데 책에 담긴 통찰이 여전히 빛나고 있어 신뢰감은 커진다. 내 눈에 한국보수주의의 영혼을 담고 있는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는 복거일 식 자유주의 정치철학 입문으로 딱 좋았다.

가장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자 복거일

저자는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자로 활동해왔는데, 그게 정치적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유연한 문화적 자유주의(영어 공용화론 등 탈 민족주의의 지평)의 세 덩어리로 구성돼 있다는 걸 기회에 재확인했다. 이 책을 읽어서 복거일이 좀 더 보이고, 한국사회의 구조가 좀 더 명쾌해졌다.

오래 전 친일파 문제와 일제시대에 대한 용기 있는 소수의견을 담은 저술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북앤피플 재출간)를 읽은 이후 그에게 끌렸지만, 이번에 생각을 바꿨다. 그는 내가 생각해온 저술가-지식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시대 자유주의 철학자로 손색없다. 안타깝게도 대중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데, 그건 복거일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를 외면해온 이 시대 이 사회가 문제다. 소모적인, 아주 소모적인 민중주의-민족주의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가 그의 메시지를 온전히 해독하기는 구조적으로 힘들었다.

어쩌면 지금이 새로운 기회다. 한때 기세 등등했던 민중주의 물결이 썰물현상을 보이며 불모화(不毛化)된 지식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가짜 선지자(先知者)들, 그리고 좌파상업주의 물결에 편승하는 조야한 지식장사꾼의 무리의 흉한 모습이 새삼스럽게 드러나는 타이밍이 지금이 아닌가? 민중주의-민족주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서 한국이 온전한 시민사회, 글로벌 국가로 거듭나기 어려운데, 지금 ‘복거일 재발견’은 헝클어진 지식사회의 재생(再生)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요, 과정이 아닐까?

이 책 후기(後記)에서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빠르게 줄어들고 민중주의의 거센 물살이 점점 높이 차오르는” 게 지금 우리라고…. 상식이지만 이런 물결이 본격화된 건 1980년대부터인데, 그는 바로 그때부터 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선택했다. 1980년대 대체(代替)역사소설 장르의 탄생을 알린 출세작 '비명(碑銘)을 찾아서'가 출판시장에서 잠깐 환영을 받았을 뿐 이후 저술은 참담한 판매 성적을 반복해야 했지만, 오랜 단련 덕에 복거일은 더욱 견고해질 수 있었다.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는 어떤 내용인가? 어제 오늘 한국사회 이념적 지형이 과연 건강한가를 되묻는 걸로 시작한다. 상식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건국 이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구성원리로 삼았다. 자유민주주의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우른 개념이고, 자본주의란 시장경제를 뜻하는데, 그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선지자적 결단이자, 우리의 총의를 모은 역사적 선택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보수란 이 우월하고, 검증된 체제를 지키려는 태도를 뜻한다. 그게 시민다운 자세이자, 올바른 정치철학이고, 엄연히 정설(定說)이다.

“헌법의 규정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문제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설(異說)이다. 진보좌파로 통칭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대안적 이념을 내세운 세력은 지금 자기들이 정설이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그들이 자칭 진보라면, 대한민국 정통세력은 퇴보란 말인가? 때문에 지금의 진보-보수를 대립시키는 관행 자체가 잘못이다. 그럼 이런 구도를 어떻게 봐야 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낼까?

“대한민국 국민들은 헌법의 규정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념적 편차는 우리 헌법에 규정된 정설 안에서의 그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사회통합을 위해 이념들 사이의 차이를 줄이려는 실제적 노력도 자유주의를 정설로 받아들인 뒤에 나와야 한다. 우리 헌법에 구현된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의 이념적 타협은 우리 사회의 바탕을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허문다.”(11쪽)

표현은 절제됐지만, 내용은 더 없이 단호하다. 우리와 달리 미국의 경우 래디컬스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5~10%는 있다. 그런 이들은 통합의 대상이 아니고, 교육의 대상이고 법치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의 경우 무려 20~25%에 달한다. 더구나 북한이라는 정치적 실체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당연히 한국사회 보수는 헌법적 가치라는 정설이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단언이다. 이런 원칙적 언명은 당연히 요즘 관심인 통진당 이석기 문제에 대한 암시를 전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 여기에서 묻자.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그건 사회적 강제나 집단주의적 동원방식을 줄여서 개인의 자유를 한껏 보장하는 이념을 뜻한다. 상식이지만 18세기 말 이후 근대 시민사회를 이끈 기본 이념이자,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핵심이념이 자유주의다.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와 민주주의를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철 지난 좌파 외에는 거의 없다. 문제는 경제적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실은 이게 자유주의 철학의 뼈대라는 점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안은 자본주의란 말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문제였다. 그 용어를 만든 건 마르크스였다. 그가 자본가 혹은 자본가적이라는 말을 쓸 때부터 기업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생각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좌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또 한 번의 ‘더러운 말’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돌을 던진다. 국내 정치상황도 비슷해서 경제민주화라는 구호를 외쳐야만 표를 모은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의롭다”(49쪽)는 게 복거일의 용기 있는 발언이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 흠집 내는 좌파가 만든 용어

그런데도 왜 반자본주의, 반시장경제, 반기업심리가 그렇게 기승을 부릴까? 인류사를 24시간으로 칠 경우 근대적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은 23시간 57분쯤이다. 사람들은 원시시대 형성된 평등한 가난이나 혹은 공동체적 정서 등에 너무 익숙하다. 이런 정서 속에서 대기업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욕을 해야 대중적 호응을 받는다. 자유란 말 대신 정의와 공정이란 구호를 외쳐야 누구라도 쉽게 알아듣고 공감을 한다.

저자의 말대로 경제학자 슘페터는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는 내부에 자기파괴의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는데, 그걸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숱한 대중매체나, 민중주의의 유혹에 빠진 얼간이 지식인 그룹이 입을 모아 반기업, 반자본주의의 비판을 하고,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확신을 갖기보다는 국가 개입을 원하는 구조 속에서 자기 파괴의 힘은 더욱 커진다. 지금 한국사회처럼 아찔하게 위험한 곳은 없다. 이런 우리에게 지난 반세기 시장경제에서 한국인은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를 경험한 게 아니라 빈익부 부익부의 경이로운 성취를 했음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복거일의 글 중 그만의 통찰에 빛나는 말로 기억되는 게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전체주의 성향을 가진 민족사회주의 세력으로 풀이한 대목이 아주 볼만했다. 민족주의와 좌파 사회주의가 결합된 사회 병리학 충동 혹은 이념이란 뜻이다. 민족사회주의의 고전적 형태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을 말한다. 저자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을 우파 이념의 하나로 보지 않고, 사회주의의 한 변종으로 본다. 오래 전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민족사회주의의 뿌리는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왜 민족사회주의 세력인가

소비에트가 됐건 나치 독일이건, 그리고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이건 그들은 공격적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기성사회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악마화된 적을 상정하는 것도 같다. 나치 독일에게는 유태인이 악마였다면, 김대중 노무현은 친일파, 군부 정권, 강남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꼽았고, 미국과 일본을 외부의 적으로 설정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예외 없이 자유주의 철학과 정반대로 단체주의 혹은 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에는 이 밖에도 짧지만, 오랜 내공에서 나오는 명제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반자유주의 정치체제이지 전체주의적 시스템인 공산주의 운동 70여 년을 총체적 실패라고 단언하고, 지적 물리적 도덕적 문명사적으로 인류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지적한 것도 자유주의자 복거일다운 언명이다. 인류사의 이념논쟁이 이토록 깔끔하게 판명 난 경우는 자유주의-공산주의 대립이 거의 유일하다.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자 가운데 도덕적 위인은 없다는 단정도 흥미롭다.

도덕과 법치를 외면한 임의적 통치 때문에 모든 전체주의자들은 끝내 위선자로 머물거나, 도덕적 해이에 빠진다는 논리다. 스탈린, 마오쩌둥만이 그런 게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데, 그게 공격적 비판으로 들리기보다는 균형 잡힌 통찰로 들린다. “우리사회에서도 전체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위선의 정도가 평균보다 훨씬 크다. 지옥과 같은 북한 체제를 지지하고 북한 지도자들을 숭상하면서도 북한에서는 살지 않으려는 종북주의자들과, 미국을 늘 비판하면서도 자식들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반미주의자들은 전형적이다.”(82쪽)

그가 얼마나 일관성 있는 자유주의자, 탈 민족주의자인가는 영어 공용화론를 제기한 장본인이라는 데서 거듭 재확인되는데, 이 책에서도 한 두 페이지에 걸쳐 예의 소신이 재확인되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어쨌거나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는 한마디로 추상도가 매우 높은 고급 저술이다. 이념논쟁의 이슈에 일대일 대응을 하지 않고, 약간 떨어져서 관망하지만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자세는 실로 흔치 않은 종류의 것이다.

누구는 복거일에게 좀 더 전투적 자세를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저자의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이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는 흙탕물 속에 자신의 정치철학 경제철학을 지켜온 지식인의 견고함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상찬과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 저런 판단 속에 그의 책 여러 권을 새로 구입했다. '경제적 자유의 회복'(문학과지성사),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역사가 말하게 하라'(다사헌 펴냄) 등이 그것인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담긴 깊은 성찰을 맛볼 기회라고 생각하니 책더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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