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세계관 깃든 한샘스타일 만들 것"
[비즈&피플]권영걸 한샘 디자인총괄 사장..."가구가 아닌 가치를 파는 기업 추구"
지난달 20일부터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는 '키친 20세기 부엌과 디자인'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1920년대 '프랑크푸르트부엌'에서부터 1990년대 '불탑(Bulthaup)시스템부엌'까지 20세기 부엌의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중 20세기 부엌의 마지막을 한국 브랜드인 '한샘'으로 채우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비록 한샘에서 협찬했다고는 하지만, 20세기를 풍미한 세계적 부엌시스템에 한샘의 부엌이 1층 전체를 채운 걸 보며 자부심마저 들 정도였다.
1970년 조창걸 명예회장이 서울대학교 동문들과 아주 소박하게 출발한 한샘이 어느새 매출 1조원을 넘어서는 회사가 됐다. '가구의 맥도날드' 이케아가 한국에 들어와도 끄떡없을 회사가 있다면 한샘이다.
한샘은 시대를 읽고 시장 흐름을 읽는 예민한 촉수가 있다. 1980년대 시스템 부엌을 내놓으면서 아직도 국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달려오다 보니 서비스나 제품의 질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한샘은 최근 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핵심 키워드로 '디자인'을 선택했다. 이를 총괄할 적임자로 권영걸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를 CDO(최고디자인경영자, 사장)로 영입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서울 원서동에 자리한 한샘 디자인연구소에서 만난 권 사장은 5월에 발표할 '한샘 스타일' 1차안 준비에 분주했다.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하고 성과를 내야하는 기업이라는 생리는 분명 오랜 교직 생활을 했던 이에게 부담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 기업에 근무한 적이 있고 오세훈 서울시장 때는 서울시 부시장 겸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으로 있으면서 '디자인서울' 정책을 이끌기도 했다. 학자적 면모와 기업가적 면모를 두루 갖췄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기업들은 디자인을 잘 활용한 사례는 있었지만 그 기업을 디자인 기업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디자인을 핵심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간 경우는 없었다는 거죠. 한샘은 한국의 기업사에 최초의 디자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확신해 차 보였다. 그동안 '장사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한샘의 이미지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던져줬다.
권 사장 스스로도 "그동안 한샘을 관통하는 하나의 언어가 부족했다"며 44년간 한샘의 디자인 정체성 부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 디자인을 통해 역사에 남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 한샘은 단지 디자인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아닌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고 제시할 것이다.
"한샘의 모토는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한샘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가정이란 무엇이고 집이란 무엇인가 답을 제시하고 디자인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친 현대인들이 일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는 곳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페나 술집을 찾는 경우가 더 많죠. 필요하다면 사람들이 집으로 바로 달려가지 않고 왜 카페나 술집으로 가는지도 연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보기에 좋은 디자인 제품을 만들기보다 공간을 연구해 가정의 행복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브라운이나 올리베티와 같이 한샘을 한국의 대표적 디자인 기업으로 만들고 싶었고 서구 디자인 일변도의 가구 인테리어 시장에 동서양의 가치가 융합된 제3의 디자인을 개척해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권 사장은 오는 5월경에 '한샘 스타일'의 1차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9월에 2차를 발표하며 12월경 종합 한샘스타일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한샘은 우수한 인적 조직의 건강성으로 매출 1조원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이제는 거기에 창의성을 결합할 때입니다. 매출 10조원을 달성하려면 성장성과 건강성, 창의성이 결합돼야 합니다. 한샘을 가구를 파는 곳이 아닌 가치를 파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이케아에 대한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이케아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해낸 기업은 맞지만 가구를 소모품으로 보게 만든 주범이고 생태학적 세계관과는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케아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해낸 기업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케아가 근본적으로 욕을 먹어야 할 게 있다면 지구촌 인류가 가구를 소모품으로 보게 만든 주범이라는 점입니다. 가구를 쓰고 버리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 것은 지탄받아야 합니다. 최소한 한샘은 쓰고 버리는 가구를 만든 적은 없습니다. 가구는 간소함, 간편함, 저렴함 등을 뛰어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권 사장은 한샘을 생태학적 세계관이 깃는 가구회사로 키울 것이라고 한다. 몸의 연장으로서의 가구, 할아버지가 쓰던 의자를 손자까지 쓰도록 만들겠다는 거다. 또 일찍이 세상에 없었던 한샘만의 제품도 구상 중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가 조만간 내놓을 '한샘스타일'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를 모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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