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월드컵 4년 대장정 ‘3대 쇼크만 남았다’
조광래 ‘만화축구’ 최강희 ‘뻥축구’ 오명
‘의리축구’ 홍명보도 대안이 되지 못해
2014 브라질월드컵을 향한 한국의 도전이 막을 내렸다.
지역 예선부터 무려 4년간의 대장정은 끝내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았다. ‘세 번의 쇼크’가 한국축구가 겪어온 험난한 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광래 만화축구 ‘삿포로-레바논 쇼크’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을 이끈 허정무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 감독은 당시 유행이던 짧은 패싱게임을 통한 점유율 축구를 선언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페인의 티키타카의 한국형 모델을 추구한 선택이었다. 미드필더 이청용을 이를 두고 “만화 같은 축구”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이후 조광래 축구를 상징하는 별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만화축구의 장르는 결국 공상으로 판명 났다. 2011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의 핵심이던 박지성과 이영표가 동시에 은퇴했고, 조광래 감독은 급속한 세대교체를 통해 자신의 축구철학을 이루려 했으나 시행착오를 극복하지 못했다. 유럽파에 대한 지나친 맹신이 대표팀에 ‘파벌’ 문화를 초래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일정수준 이상의 팀을 상대로 한계에 부딪쳤고, 임기응변 능력도 떨어졌다.
조광래 감독은 삿포로 한일전 참패(0-3), 월드컵예선 레바논전 패배(1-2)로 결국 3차 예선 최종전을 마치지 못하고 경질됐다.
최강희 뻥축구 ‘주먹감자 쇼크’
구원투수로 투입된 최강희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최종예선까지만 지휘봉을 잡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 화제를 모았다. 위기에 빠진 한국축구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지만 대표팀 감독은 자신이 원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최강희 감독의 결정은 결국 대표팀의 리더십 부재와 사령탑의 레임덕 현상을 초래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유럽파를 편애하고 국내파를 홀대한 조광래 감독과 정반대로, 최강희 감독은 유럽파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대신 자신이 잘 아는 국내파의 결속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최강희 감독은 힘겹게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했으나 라이벌 이란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연이어 0-1 패배를 당했고, 최종전에서는 상대팀 감독으로부터 안방에서 주먹감자까지 당하는 굴욕을 겪으며 상처뿐인 영광에 그쳤다.
최강희 감독은 최종예선 이 끝나고 바로 사임했지만 이후에도 기성용의 SNS 사태로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다.
홍명보 의리사커 ‘알제리 쇼크’
최강희 감독의 뒤를 이어 월드컵 본선을 지휘할 감독으로 2002 한일월드컵과 2012 런던올림픽의 영웅 홍명보 감독이 등장했다. 홍명보 감독은 자신과 런던올림픽 동메달의 신화를 함께한 ‘홍명보의 아이들’을 대거 중용하며 ‘원팀, 원골, 원스피릿’으로 강한 조직력의 축구를 표방했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오래가지 않아 한계를 드러냈다. 한 번도 클럽팀 감독을 맡아보지 않았고, 지역 예선 없이 본선에 무임승차한 홍명보 감독의 선택은 결국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선수들 위주로 팀을 구성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소속팀에서 활약’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을 초래했고 ‘의리사커’ 논란으로 이어졌다.
사상 첫 원정 8강의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던 홍명보호는 본선에서 1무 2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알제리와의 2차전에서는 무려 4골이나 내주며 참패했다. 톱시도 국가가 아닌 팀에 이처럼 대패를 당한 것도, 아프리카 팀에 4골을 내준 것도 처음이다.
홍명보호는 출범후 1년간 5승 4무 10패에 그치며 최근 10여 년간 대표팀 사령탑을 통틀어서도 최악의 성적을 기록, 4년여 간 이어온 브라질 월드컵 도전기의 잔혹한 화룡점정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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