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 "'유나의 거리' 덕분에 착한 남자 됐죠"
자연스러운 연기력으로 캐릭터 소화 '호평'
"저 자신 반성할 수 있었던 고마운 작품"
이 남자 참 착하다. 소매치기범, 전직 조폭, 꽃뱀, 일용직 노동자 등 사회가 '삼류'라 일컫는 사람들과 기꺼이 친구가 돼 준다. 그는 "사람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선한 의지로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지난 11일 종영한 종합편성채널 JTBC '유나의 거리'의 김창만(이희준) 얘기다.
"착한 김창만, 이 시대의 희망"
창만은 고아에 검정고시 출신 청년 백수다. 그럼에도 절대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간다. 아는 것도 많고 못 하는 것도 없다. 무엇보다 뼛속까지 착한 마음씨로 사회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을 위로한다. 상처와 어두운 과거를 지닌 사람들은 창만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모두에게 잘 해주는 그는 소매치기범인 여자친구를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여자친구가 아무리 그를 밀쳐내도 올곧은 신념과 착한 심성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곁을 지켜준다. 세상에 이런 남자, 아니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창만은 극 중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다.
지난 13일 서울 신사동의 한 식당에서 만난 이희준은 세상 하나뿐인 착한 남자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극 초반에는 창만이를 이해하는 게 어려웠어요. 김운경 작가님께 '세상엔 이런 사람이 없다', '창만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죠. 그때 작가님이 '창만이는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했어요. 아차 싶었죠. 창만이는 누가 뭐라 해도,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에요. 모두 힘든 시기에 창만이 같은 사람이 빛이 될 수 있도록 연기했어요. '사람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창만이의 대사를 믿고 싶고요."
창만이를 이해하며 연기했지만 그래도 힘들었던 장면은 있었다. "극 중 유나에게 엄마를 만나게 해주고 술에 취한 유나와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 떠올라요. 유나가 '제발 날 귀찮게 하지 마. 내 인생에서 꺼져'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서운했죠. 그런 유나를 차에 태워서 가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어요. 인간 이희준이라면 차 열쇠를 집어 던졌을 겁니다."(웃음)
유나의 서운한 말에도 창만은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유나를 탓하지도 않고 묵묵히,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했다. "'만약 창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했죠. 연기하기 참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어요. 착한 창만이처럼 말이죠."
청년 백수를 표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외롭고 고독하게 살기도 했다. 이런 감정은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6개월 동안 비좁은 고시원에서 살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주말에는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 반지하를 벗어나 80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는데 알고 보니 사기였던 것.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선 창만이의 미소가 번졌다.
'유나의 거리'에는 주옥같은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김운경 작가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대사에 오롯이 드러났다.
극 중 황여사(송채환)가 전과 17범인 전 남편이 약점이라고 하자, 창만은 "그건 약점이 아니라 아픈 과거죠. 사모님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언론에 약점 잡힐 것도 없고요. 저 같으면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어 "내가 진실하고 내가 정직한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쓰레기 언론이랑 싸운다는 생각말고, 내 양심의 무게를 달아 본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내 양심이 떳떳하면 난 어딜 가도 떳떳한 거잖아요"라고 황여사를 위로한다. 창만이의 우직한 성품이 묻어난 대사였다.
이희준은 "기억에 남는 대사가 많다"며 "명대사를 쓴 김운경 작가님은 최고"라고 김 작가를 치켜세웠다. 이어 "김운경 작가는 드라마를 위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취재했다.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이다. 취재 때문에 콜라텍도 다녔다"고 설명했다. 다세대 주택 할아버지들이 지갑에 비아그라를 넣고 다니는 설정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회에서 창만이 유나에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창만은 "그 소설을 읽으면 오리배가 좋아져.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오리배를 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지금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랑 타고 싶어"라고 프러포즈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거창한 프러포즈가 아닌 딱 창만 스타일이었다. 이희준은 여운을 줄 수 있는 만큼만 연기했다.
"'유나의 거리' 통해 인생 배워"
8개월 동안 창만으로 다세대 주택에 산 그는 배우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상대 역인 김옥빈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어린 동생이지만 많이 배웠다"며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현장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김옥빈이 잘 해결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김옥빈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게 신이 났다"며 "무색무취한 창만이 매력이 그들을 통해 잘 드러난 것 같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희준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 '직장의 신' 등 지상파 프로그램에서 높은 시청률을 체험했다. 종합편성채널 드라마는 처음이라 2%대 시청률이 적응이 안 됐다고 털어놨다.
"시청률이 저조해서 아쉬웠는데 '해무' 시사회 때 설경구 선배, 봉준호·류승완 감독님이 '유나의 거리' 잘 보고 있다고 했어요. 그때 힘이 났죠. '존경하는 선배들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꼈어요. 드라마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있어 감사했죠."
이희준은 창만이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해졌다고 했다. "착한 창만이에 비해 저는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창만이를 통해 변했어요. 창만이처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됐고, 지인들을 위로해주는 저를 발견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죠."
이희준은 창만이 지닌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배우가 갖춰야 할 본성이라고 했다. "연기할 때 캐릭터를 제 심장에 넣고 인물을 이해하려고 해요. 실생활에서도 누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면 '왜 그럴까?'라는 생각을 먼저 해요. 사람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요. 배우란 직업은 이런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 행복합니다."
극 중 나오는 소외 계층을 현실에서 볼 때 같이 밥을 먹으며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도 했다. 8개월 동안 창만이로 산 그는 어느새 '착한 남자'가 돼 있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