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미생'이 건넨 위로
윤태호 작가 원작 만화 200만부 팔려
연일 최고 시청률 경신 '미생 신드롬'
'미생'이 '완생'이 됐다. tvN 금토드라마 '미생'은 "과연 될까?"라는 우려를 보란 듯이 떨치고 사회 전반에 '미생 신드롬'을 일으켰다. 매회 자체 최고치 시청률을 기록하며 케이블 드라마의 신화를 새로 썼다.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해 바둑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가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종합상사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윤태호 작가의 원작 만화는 200만부를 팔아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놀랄 만큼이나 뜨겁다.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드라마", "'미생'을 보고 술 취해 들어오는 남편을 이해했다", "바로 내 얘기 같았다"는 공감 어린 시청평이 홈페이지 게시판을 메웠다.
'미생'에는 자극적인 전개, 불륜, 3각 관계 등 지상파 드라마가 시청률을 위해 내세우는 소재가 없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회사원 얘기가 전부다.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과 정윤정 작가는 대중의 이런 호응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씨네시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감독은 "많은 사람을 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며 "1,2회 보고 울었다는 시청자가 많다는 얘길 듣고 '많은 사람이 힘들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미생'을 외롭고 우울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드라마라고 정의했다. "직장인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어요. 처음엔 타인 같은데 내 온도와 맞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 그리고 싶었죠.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장그래였어요."
정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을 이루는 기본 감정은 연민이다. "'미생'의 바탕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에요.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시청자들도 모든 캐릭터를 통해 연민을 느끼고 있어서예요. 하 대리나 강 대리도 겉으론 나쁘게 보이지만 연민을 품고 사람들을 대하죠."
'미생'에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은 장면과 대사들이 많다. 극 중 오상식 차장(이성민)이 계약을 따기 위해 접대하는 장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찡해진다. 장그래(임시완)가 사업을 진행하던 도중 계약직 사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하는 모습에선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 사실적인 모습은 정 작가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여기에 보조 작가들의 취재력까지 더해졌다. 보조작가 두 명은 한 무역상사에 한 달 반 동안 출근해서 회식 자리까지 참석하며 출근 일지를 썼다. 직장인을 통해서 그리고자 했던 건 사람 이야기였다.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담고 싶었어요. 20~30대 보조 작가와 40대인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이들의 꿈, 고충, 딜레마 등을 얘기했어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무엇일까 생각했죠."
정 작가의 회사생활은 스물네 살 때 사보 편집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9개월이 전부다. 그는 당시 사보 사본을 들고 소위 '갑'인 대기업 직원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을 '미생'에 담아냈다고 했다. 특히 40대 남성 직장인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오차장이 술 취해서 택시를 잡다가 넘어지는 모습, 큰 양복을 입은 초라한 몸, 지갑 안에 들어있는 복권, 힘들어도 밥을 먹는 모습, 술 먹고 토하는 장면에서 그렇다.
명대사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김 감독과 정 작가의 대답은 "내일 봅시다"였다. 정 작가는 "저도 사람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했고, 김 감독은 "단순히 내일 보자는 뜻이 아니라 네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또 오차장의 대사 "우리 애"와 장백기(강하늘)가 그래에게 마음을 열면서 뱉은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래도 내일 봅시다. 오늘만큼 제 스펙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대사가 중요하죠. 백기와 그래에게 지금의 시련이 너희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성공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좌절,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통찰력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래의 성장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에 대한 성장을 뜻한다고 김 감독은 강조했다.
시청자들은 '미생'을 보며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너도 힘들구나"라는 위로를 받는다. 김 감독과 정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똑같다.
"다른 사람이 힘든 걸 보면 위로를 받기도 하잖아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 저렇게 힘들구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정 작가)
"어설픈 힐링이나 위로는 피하고 싶어요. 다만 이렇게 힘든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더 나아가서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는 위로를 건넵니다."(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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