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이 대중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을미년 최초 천만 관객 달성을 향해 순항 중이다.
국제시장은 대한민국 1세대들이 6.25전쟁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일으킨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그려내면서 당시 직접 나라를 일으킨 세대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여기에 20대, 30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감동을 선사하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산업화를 일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정부를 미화시키기 위한 영화, 이념적인 영화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에 데일리안은 지난 7일 영화 국제시장을 함께 관람한 파독간호사 출신 황보수자(73, 1966~1969년 파독 간호사) 씨와 대학생 김대영(21, 서강대 경제학과 2학년) 씨를 통해 영화 관람 후기를 중심으로 신구(新舊)가 느낀 ‘국제시장’과 현대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황보 씨와 김 씨는 ‘청년이여는미래’(구 미래를여는청년포럼, 대표 신보라)가 주최한 ‘국제시장을 보며 1·3세대 추억나눔’ 행사에 참석 후 데일리안과 인터뷰에 응했다.<편집자 주>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철수 당시 덕수와 헤어진 여동생 막순이가 이산가족상봉 중계 모니터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내 동생 귀 뒤에 사마귀가 있다”는 덕수의 말에 막순이는 귀 한쪽을 접으며 사마귀를 보인다. 관객들의 흐느끼기 시작한다. “오빠의 말 한마디가 기억난다.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래이’”라며 울부짖기 시작하는 막순이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참던 관객들까지 훌쩍거린다. 막순이가 찢어진 저고리 소매까지 들어보이자 영화관은 눈물바다가 됐다.
황보수자 씨(이하 황보) = “저는 이 장면에서 너무 많이 울었어요. 애가 있는 부모입장에서 보면 더욱 가슴이 미어져요. 막순이가 흥남철수 때 덕수와 이별하고, 그런데 다행히도 미국 가서 잘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터졌죠. 한국말은 못하면서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래이’라는 오빠 말을 기억하는 모습에 제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대영 씨(이하 김) = “저도 선생님처럼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 너무 많이 울었어요. 가족과 생이별하고 다시 만나고, 광부로, 간호사로 타지에 가서 고생한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의 이런 고통 때문에 현재 우리가 웃을 수 있구나 생각하고 있죠.”
-이산가족 상봉장면 외에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나요?
황보 = “글쎄요. 영화 자체가 내 인생을 어찌나 그대로 옮겨놨는지 영화 내내 울고, 웃고, 울고, 웃고를 반복하다보니 시간이 다 갔어요. 그런데 가장 공감되는 대사는 있죠. 덕수가 한 말인데, ‘우리가 이 시대를 겪었으니까 다행이다’라는 대사요. 그게 딱 제 심정이에요. 어찌나 우리 마음을 그렇게 잘 표현했는지.”
김 = “저는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덕수가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요. 덕수가 아버지에게 ‘저 이정도면 잘 살았죠? 너무 힘들었어요’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아버지가 보듬어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펑펑 울었어요.
특히 덕수의 집 거실에서는 자식들이 깔깔대며 놀고 있는데 덕수는 자기 혼자 방으로 돌아와서 흐느끼는 장면에서 참 많은 것을 느꼈죠. 덕수의 그런 눈물 때문에 자식들은 옆 거실에서 편하게 놀고 노래 부르며 즐길 수 있다는 것을요.”
황보 = “저도 영화 내내 자식들이랑 말이 통하지 않는 덕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자식들이 다 장성해서 아버지랑 더 이상 대화가 안돼. 많은 노인들이 느끼고 있는 거겠지만. 아무튼 영화가 내 삶을 그대로 그려주고 있어서 내 일생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우리는 이제 나라를 잘 살게 만들어 놨으니까 앞으로 딱 하나 남은 과제인 통일만 좀 젊은 사람들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르신들이 바라는 것만큼 최근 젊은 세대들은 통일에 대해서는 관심 없는 것 같던데요.
김 = “저도 ‘굳이 통일을 해야 하나?’라는 쪽이었습니다. 북한이 하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억지를 부리니까요. 하지만 학교 수업에서 ‘통일은 비용이 아닌 투자로 생각하자’라는 교육을 좀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죠.”
-하지만 공감을 하며 통일을 지지하는 것과 공감하지 않으면서 주변에 따라 통일을 지지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잖아요.
김 =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과거에는 우리가 엄청나게 고생을 했지만 이렇게 지금 잘 살고 있어요.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죠. 이 생각을 하니까 그들도 우리정도 만큼은 살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하고요.”
-국제시장에서 덕수와 영자가 싸우던 도중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 젊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이질적이었을 것 같아요.
김 = “제 주변에는 그런 친구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 시대가 저랬구나 보고 재밌어 했죠. 군대가면 한다면서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시고는 추억에 잠겼다고 하셨습니다. 보기에도 거부감 없는 장면이었고요.”
황보 = “국기에 대한 경례 하는 것 보고 뭐라고 하면 안 되지. 그냥 우리 일상이었어요.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고요. 길가다가도 멈춰서 경례해야 하고, 영화관에서도 했을겁니다. 싸우다가도 당연히 일어서서 경례 해야죠.그 때는 정말 그랬어요.
파독 광부 면접 장면에서 애국가 부르는 장면도 나오잖아요. 그것도 이상한 장면이 아니에요. ‘애국심 투철’이라는 도장 찍혀서 합격되는 것도 다 그 시절 풍경이에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김대영 씨가 태어났다면 6.25전쟁 참전이라든가, 파독광부로 몸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김 =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전쟁이라면 쉽게 뛰어들 생각 못하죠. 무섭기도 하고요. 제 몸 건사하는 것이 먼저니까요. 하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라면 파독광부로 몸을 던졌을 것 같기는 합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항상 저에게 ‘내가 없으면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라는 말씀 많이 하세요. 때문에 제가 가장이 되는 상황이 온다면 공부도 포기할 수 있어요. 저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편이에요.”
황보 = “파독되는 사람들은 거기서 죽을지, 아닐지 생각하고 가는 사람은 없었을 거에요. 당시 사는 환경 너무 열악했던 시절이었고, 또 독일가면 독일 사람들이랑 똑같은 대우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당시 정부에서 우리들 처우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써줬던 것 같아요. 당시 독일 말도 못하고 체구도 작은 우리 파독 간호사들을 독일인들과 똑같이 대우해줬거든요.
그런데 독일에 파견돼서 한 병원에 저를 포함한 6명의 간호사가 배치됐는데 신체검사 도중 1명에게서 기생충이 발견됐어요. 그래서 그 동료는 2주 동안 일도 못하는 해프닝도 벌어졌었죠. 그 간호사는 2주간 격리돼서 약을 먹으면서 기생충부터 제거하고 그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당시 우리 국민 96%가 기생충이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파견 3년 후에는 우리 파독 간호사들이 그동안 너무 잘해서 남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어요. 미국이나 캐나다에도 이런 사실이 퍼져서 파독 한국 간호사라면 모두 데리려 가려고 했었습니다. 워낙 평가가 좋았어요.”
-저는 영화에서 덕수가 해양대학교 합격했다는 소식 듣고 좋아하다가 포기하고 동생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 베트남에 들어가는 장면도 뭉클했습니다.
황보 = “제가 이 영화를 제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 장면도 저와 너무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남편은 황해도 피난민 출신이라 마땅히 직업을 구할수도 없었고 실업율도 높았어요. 그런데 저는 독일 근무 경력이 있어서 한 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수간호사로 쉽게 들어갔죠. 귀국해서 두달 정도 쉬려고 했는데 그조차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독일에서 살면서 '한국, 많이 좋아졌겠지'하고 귀국했는데 그렇지 않았던거죠.
결국 1981년에 들어서야 서강대에 재입학했어요. 17년만의 일이었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초대 파독협회 김태우 회장도 1964년에 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독일로 갔다가 46년만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2008년에 졸업했습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인데 영화가 어떻게 그것을 어떻게 알고 덕수가 대학교를 합격해서 좋아하는 모습을 표현해놨는지... 그 장면이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죠.”
-당시 그렇게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니 불만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사회에 불만을 갖는 젊은이들이 상당히 많아요.
황보 = “그 시대, 모두 다 가난했어요. 누가 좋은 옷 입고, 나쁜 옷 입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한끼를 먹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던 시대였죠. '불만이라는게 있었나?'라는 반문을 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려고 하니까 불평하는 것 같아요. 노력하면 얼마든지 길이 있는데 말이죠. 우리 시절엔 그렇게 살았고요.”
김 = “저도 저희 세대의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사회가 잘못하는 부분, 분명히 있죠. 그렇데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게 우리나라죠. 노력조차 안하고 불만 갖는 것은 문제가 있죠.
제 전공은 경제학입니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 최선의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 스스로가 우리나라 사회에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고도 생각합니다. 인문·사회과학 연구하는 친구들은 좀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니까 사회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것 같아요.”
-영화에 ‘옥의 티’도 있었나요?
황보 = “아쉬운 점은 마치 파독간호사들이 시체를 닦으면서 고통스럽고 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려졌다는 점이에요.
사실 간호사라면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임종간호’라는 것을 하죠. 간호사라면 자신의 환자가 떠날 때가 되면 그분을 깨끗한 모습으로 치장해 드리고 대소변을 닦아 드리는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껴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웠죠. 파독 간호사들이라면 돌아가신 자신의 환자의 대소변을 닦는 것에 대해 힘들어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안실 들어갈 때까지 ‘내 환자’였으니까요.”
-20대, 30대의 젊은 청년세대를 보면 우리나라의 희망이 보이시나요?
황보 = “물론이죠. 아니라고 말하는 노인들도 있는데 그것은 진심이 아니죠. ‘너희들은 더 잘 될 수 있다’ 이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비난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젊은이들이 자꾸 작은 것에 함몰되다 보면 큰 그림을 못 봐요. 청년들에게 큰 그림을 보면 바르게 갈 수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네요.”
-대영 씨도 우리나라를 일군 어르신들에게 한 말씀 드리자면?
김 = “감사하다는 얘기 밖에 전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타지에서, 정신·육체적인 어려움 다 이겨내시고 나라를 세워주셨는데 앞으로는 저희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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