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킹스맨' 뜨고 '19금 그레이' 죽쑨 이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관능성에 함몰된 '청불 영화' 전략 실패할 수 밖에
한때 19금 노래 앨범이 유행을 한 적이 있다. 19금 노래들은 사회의 모순을 담아낸다고 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위선적인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차별화되어 보였다. 어느새 빨간 딱지가 19금이라고 하니 좀 다른 콘텐츠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앨범 안의 곡들은 대개 욕설이나 직설적인 가사가 좀 있을 뿐 다른 일반 노래들과 다를 바 없었다. 곧 19금 앨범은 사라졌다. 애초의 기대에 음악 콘텐츠가 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19금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했다. 19금 영화는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에 관객을 찢어 갖게 만든다. 하지만 몇몇 사례를 통해 긍정적인 결과를 낸 바 있다. 이 때문에 오히려 19금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19금 앨범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다. 19금 청불 영화라고 하니 청소년들이 소외감을 느낄만하다. 하지만, 어차피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들은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청소년들의 시청이 가능한 시대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19금 청불 영화들이 노리는 마케팅 포인트는 무엇일 지 짐작할 수 있다.
대개 성애적인 내용이나 폭력적인 장면이 있을수록 19금 청불 딱지가 붙는다. 하지만 이제 19금 청불영화도 하이컨셉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영화 '킹스맨'의 선전에서 알 수 있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몇몇 장면을 빼면 19금 청불영화라고 부를 수 없어 보인다. 한국 영화들이 19금 영화로 묶일 때, 매번 사용하는 성애 장면도 거의 없다. 유명 남자 배우의 벗은 몸을 성적 체위에 맞게 접사하거나 여배우의 가슴이 드러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최근 개봉 영화 '순수의 시대'도 육체적 관능성을 강조하는 컨셉에 액션 그리고 멜로를 조합하고 있다. '인간중독', '황제를 위하여', '마담 뺑덕'도 이러한 육체적 관능성에 바탕을 둔 19금 영화였고, 빛을 크게 못봤다.
이에 반해 관능성이 절제된 영화 '킹스맨'은 19금 청불 영화이다. 기껏해야 공주와 나누는 베드신의 암시 장면 정도가 등장한다. 또한 19금 영화로 묶인 것은 아마도 마지막에 사람들의 머리가 집단적으로 달아나는 장면 등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그 장면을 편집한다면 15세 이상 관람가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 장면을 뺀다면 이 영화의 독창적 컨셉은 사라지고 만다. 여러 에피소드가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액션 캐릭터에 대한 일대 변혁을 시도했다. 점잖은 신사의 부드러운 이미지에 액션 주인공의 활동성을 절묘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육체적인 근육이나 왈력만을 강조하는 거친 남성성과는 완전 반대의 캐릭터에 해당한다. 결국 매력적인 캐릭터를 잘 구축했기 때문에 대중적 흥행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 매력은 다른 액션 영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이는 오히려 A급 장르가 아니라 B급 장르에서 온 것이다. 다양한 장르에서 융합을 이끌어냈던 점도 영화 킹스맨의 흥행을 만들어냈다.
이런 점들은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는 이유는 바로 다른 컨셉을 통해 보고 싶은 내용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가 한국 영화처럼 야한 장면이나 잔인한 폭력성 자체에 흥행 승부의 포인트를 가졌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거꾸로 한국 영화가 어떤 방향성 속에서 19금 청불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결국 19금이라는 딱지 자체가 흥행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 셈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관객들이 자극적인 것에 더 많이 노출되는 상황이기에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서 19금 청불 영화들이 대거 제작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자극적인 것만을 원한다면 비싼 돈을 내고 극장에까지 찾아가서 관람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 영화가 답습적인 흥행 코드의 조합으로 청불 영화로 수익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단 한국영화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잘 보여주었다. 예상 밖의 저조한 흥행 원인은 바로 육체적 관능성 자체에만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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