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열광? 거세당한 가장의 참담함...
<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일찍이 뿌리뽑힌 반도의 무혼
국군의 날은 군사정권 폐해라며 남의 전승절 열광
‘선비’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우리말이라 한다. 순 우리말인지 원(元)나라에서 들어온 몽골말인지 그 어원이 분명치는 않지만 아무튼 한자 ‘士’ ‘儒’ ‘彦’을 ‘선비’로 해석한다. 고대 갑골문에서 사(士)란 남성의 생식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남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벼슬한 선비를 ‘사대부(士大夫)’라 불렀는데 바로 ‘양반(兩班)’이다. 한데 양반은 문반(文班, 東班, 鶴班)과 무반(武班, 西班, 虎班)을 일컫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는 ‘선비’을 ‘문사(文士)’로만 인식하지 ‘무사(武士)’로는 선뜻 수긍하지 못한다. 교수나 교사는 당연히 선비라 여기지만 군인에게는 선비란 말이 어색하다. 하여 하급 군인 간부들에게만 사(士)자를 붙이고 있다.
뿌리 뽑힌 반도의 무혼(武魂)
한민족의 상무숭덕(尙武崇德), 즉 무덕(武德)은 고려 말 삼별초군의 멸망과 함께 반도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의 무인들은 왜 그토록 끝까지 원(元)에 저항했을까? 왕과 문신들은 이미 항복하였음에도 유독 그들만은 강화도, 완도, 제주도로 쫓겨 다니며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지막까지 싸웠을까? 원(元)나라를 우습게 본 어리석음 때문일까?
역사상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에서 패하면 패전국의 무장(武將)들은 모두 죽였었다. 그게 무슨 말씀? 사로잡히거나 투항한 적장(敵將)에게 관용을 베풀어 신하로 삼은 고사도 적지 않은데! 라고 항변할 이도 있겠지만, 기실 그런 일은 전쟁 중에나 왕왕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미 승리가 확정되어버리면 어김없이 적장의 목을 친다. 설사 항복했다한들 살려두었다간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문신들은 죽이지 않는다. 정복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요긴하기 때문이다. 굳이 새 왕조에 협조하지 않는다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 그래야 백성들을 안심시켜 새 왕조에 복종하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능력이나 배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란을 획책한다 해도 필시 입으로 할 것이니 그때 가서 잡아 죽여도 되기 때문이다.
갈등의 씨앗, 과거제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신에 오르거나 관리에 등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공(軍功)이 있어야만 했다. '사기(史記) 상군열전(商軍列傳)'에 㰡Ҭ
실 사람이 군공(軍功)이 없으면 족보에 넣지 않는다㰡ӪӠ 하였을 만큼 오직 승적(勝敵)의 군공만이 유일한 벼슬길이었다.
중국 수양제(隋煬帝)에 이르러 처음으로 과거제(科擧制)를 만들었는데 이후 㰡1천3백여 년간 중국의 관리 선발 제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청(淸)말(1905) 학교 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무관(武官)을 선발하는 무거(武擧)는 당(唐)의 무측천(武則天)에 의해 처음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958년 고려 광종 때에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문벌 귀족들의 권력과 경제력 독점은 이에 반발하는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도한 무인란(武人亂)은 무반(武班)에 대한 차별과 군인들의 불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정변으로, 고려 사회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5백 년 동안 진행된 조선 선비 거세 작업
무(武)의 씨가 마른 고려 말에 이성계라는 오랑캐 무장이 나타나 떡 집어 먹듯 나라를 차지하였다. 이성계의 뛰어난 점은 그의 특출한 무예가 아니라 문사들의 생리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적절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학을 국본으로 세우고 숭유억무(崇儒抑武)로 조선의 선비들을 모조리 거세를 시켜버렸다.
조선시대에는 유가 사상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지식인들로 하여금 오로지 과거시험을 통해서만 벼슬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게다가 문무과를 철저히 구분하되 문과를 우대하였다. 그러는 한편 남이(南怡) 장군 등 간간히 생겨나는 무장다운 무장은 이런저런 죄목을 씌워 솎아냄으로써 씨를 말려나갔다. 하여 이순신 장군도 너무 잘 싸우니까 혹시나 하여 불러다 거세를 확인한 다음 다시 나가 싸우게 한 것이다.
그 흔한 귀양도 무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반(武班)은 설사 불충이나 역모가 사실이 아닌 모함임이 밝혀졌다 해도 결과는 똑같이 죽음이다. 반대로 문반(文班)은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이 귀양 보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다시 불러다 부리면 된다. 하여 열심히 임을 그리는 시를 지어 임금님 귀에 들리도록 갖가지 로비를 펼쳤다. 그 반성문이 곧 한국의 고전문학의 주류이다.
덕분에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500년 왕조가 가능했다. 나라가 아무리 썩어도 이를 갈아엎고 새 나라를 세울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이 이성계처럼 떡 집어 먹듯 조선을 차지해버렸다. 오늘날에는 북한에서 이 거세 작업이 한창이다. 하여 3대 세습이 가능한 것이리라. 당연히 때가 오면 먼저 집어 먹는 놈이 임자다.
신라-고려 초기에까지 이어져 오던 문무겸전 정신은 과거제의 도입을 계기로 쪼개지고 만다.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고시의 내용 또한 중세 한국인의 가치 지향, 사유 방식, 사회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5백여 년 동안 고착화된 조선인의 행동 및 사유 양식은 나라가 망해서도 떨쳐내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어져 현재 우리의 가치 지향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과거(科擧)제도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인재 선발 방식으로 인류사에서 훌륭한 제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처럼 문무유별(文武有別)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과거제도 도입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상하의 구분만 있었지, 동서(文武)의 갈림은 없었다. 우리 문화에서 쪼개짐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반면 서양이나 일본에선 이런 과거제도가 없었다.
조선의 선비는 왜 신사가 되지 못하는가?
우리가 흔히 ‘신사(紳士)’라 하면 ‘영국 신사’를 떠올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신사라 할 수 있을까? 우선 신사의 덕목으로는 용기, 관용, 정직, 절제, 신의, 예절, 페어플레이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옛 기사도(騎士道)와 다름없다. 그 외에 교양과 지성, 음악, 연극, 미술, 댄스, 승마, 사냥, 수영, 등산 등 예술과 스포츠에 대한 취미는 기본이다. 게다가 라틴어를 기본으로 수개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
말 그대로 신사란 문무겸전의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니 왕족이나 부유한 귀족의 자제가 아니면 위와 같은 신사의 요건을 두루 갖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다. 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학자, 의사, 변호사, 외교관 등 상위의 전문직업을 가지면서 적당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그리고 서너 가지의 취미활동이 가능한 사람을 통상적으로 신사라 부른다.
조선에서의 선비(士)란 샌님(生員), 유생(儒生) 즉 문사(文士)를 일컫지만 일본이나 유럽에선 무사(武士), 즉 기사(騎士)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근대 이전의 모든 왕조에서 문사(文士)는 사(士)가 아니었다. 그저 살림살이 맡아 관리하는 집사(執事)였을 뿐으로 신사가 될 수 없었다.
당연히 신라의 화랑, 서양의 기사, 일본의 사무라이는 문무겸전의 완성적인 인격체였다. 허나 중국과 한국은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문무(文武)가 구별되고 그에 따라 편향된 인격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편협하고 고집스럽고 배려심 없는 근성과 반쪽짜리 세계관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이 조선 말기처럼 썩을 대로 썩었는지 자고나면 파렴치한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이 땅의 ‘거시기[士]’가 모조리 성도착증에 걸렸는지 성추행이 범람을 하고 있어 ‘동방예의지국’이란 글자를 찾아 지워야 할 지경이다. 그때마다 이 나라 샌님들은 ‘인성교육’을 강화하여 ‘선비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아무렴 ‘선비’의 본 의미를 제대로 알고서 하는 말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교를 받들며 자나깨나 공자왈맹자왈을 가르쳐 온 나라에서 새삼 ‘인성교육’이라니? ‘인성교육진흥법’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본디 선비의 덕목인 병가오덕(兵家五德, 智信仁嚴勇)은 있는지조차 모른 채 허구한 날 유가오덕(儒家五德, 仁義禮智信)만 외워온 업보겠다.
낭만 혹은 무지 용감한 민족
지난 달 일본 아베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를 통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잘못을 용서하고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도와준 연합국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아 미국으로부터 환영받았다. 그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마치 불굴의 투지로 일본을 물리치고 해방된 양 자기 도취적인 연설을 하였다.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이 언제 철들어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로 인식할 수 있을지, 언제 제대로 감사 표시를 할지 참 답답해했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관을 두고 많은 한국인들이 무슨 대단한 경사인 양 들떠서 야단들이다. 시진핑 주석 가까이에 섰다하여 한국의 위상이 엄청나게 격상된 것처럼 우쭐해 하지만 솔직히 낯 간지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거국적으로 준비한 잔치에 고작 러시아 푸틴 대통령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 없으니,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 선 것일 뿐이다. 철딱서니 없는 일부 언론들은 여군의장대의 미모에 침까지 흘렸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2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떠한 행동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무렴 제발 그러려니 하지만 기실 이 말을 뒤집으면 중국은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또 미국은 언짢은 속내를 감추고 박 대통령의 참석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외교의 ABC를 아는 이라면 그 말 전후에 생략된 말들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그 ‘존중의 결과’를 한국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혀를 찰 일이겠다.
제 나라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군사정권의 잔재라며 보기 싫다고 계룡산 기슭에 숨어서 저들끼리 치르게 하면서, 느닷없이 중국 열병식에 온 국민들이 난리다. 마치 금방이라도 중국이 통일시켜줄 것처럼. 신뢰는 피로 굳히는 것이지 말로 쌓는 것 아니다. 피보다 말이 앞서는 거세된 조선 선비근성이 백여 년 만에 다시 도진 것인가? 이래저래 올 겨울은 무척 추울 것 같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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