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판 트루먼쇼 '태양아래'…"모든 촬영 통제당해"
만스키 감독 "북에선 인간적 리액션이나 반응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조선)소년단에 들어갔으니 어떤 것을 기대하니?"라는 질문에 진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경애하는 김정은..."으로 시작하는 찬양사를 읊픈 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낸다. "울지 말고 좋은 것 생각해봐요. 기분 좋은 일, 아니면 (좋은) 시라도 생각해봐"라는 말에 진미는 "잘 모릅니다"라고 말한 후 한참을 고민하다가 또다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대한 찬양사를 시작한다.
북한 체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에서 북한 당국의 배석, 검열 등 개입 없이 순수하게 촬영된 몇 안 되는 장면이다. 다큐 후반부에 나오는 이 장면에서 러시아 촬영 팀과 인터뷰를 진행한 진미의 눈동자는 시종일관 격하게 흔들렸다.
다큐 영화 태양 아래는 러시아 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시선에서 바라본 북한의 현실을 그렸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1년간 평양 소녀 진미와 생활하며 그녀의 가족, 친구, 이웃을 포함한 평양 주민의 삶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태양 아래는 평양 전체가 거대한 연출 도시, 거대한 영화 세트장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영화에서 북한 당국이 활기찬 평양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많은 평양시민들을 동원하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포착된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26일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북한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인간적인 리액션이나 반응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이유다.
영화를 찍는 도중 북한 당국자가 끼어들며 "웃는 장면이 없다. 한번 크게 웃어야 한다", "최대한 밝게 합시다"라고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박수를 유도하고 등장인물들의 대사까지 조정하는 등의 '연기지도'를 벌이기도 한다.
주인공 진미의 부모 직업은 각각 기자에서 봉제공장 책임 지도원, 식당 종업원에서 두유공장 노동자로 둔갑된다. 진미가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부모의 직업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으니 진미의 부모가 업무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다. 영화에서는 촬영 전 진미 아버지가 봉제공장 직원들에게 업무 설명을 받고 어떤 식으로 말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된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나는 내가 찍고 싶었던 것을 하나도 찍지 못했다. 찍었던 모든 장면은 100% 통제 하에 촬영됐다"면서 "내가 북한 당국의 통제 없이 찍었던 유일한 장면은 호텔 창에서 바라본 바깥의 모습과 마지막 부분에서 진미가 우는 장면뿐이었다"라고 밝혔다.
실제 영화에서는 호텔 창밖을 통해 바라본 평양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 그려지는데, 이 때 마침 평양시 정전으로 전동차가 멈춰서고 이를 평양시민들이 끌고 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조차도 만성적인 전기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촬영했던 분량 100%는 모두 가지고 나왔다. 북한 당국의 검열로부터 촬영분을 숨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서 "북한에서 촬영을 하는 동안 촬영한 내용 모두를 북한 당국의 검열과 통제를 위해 제출해야 했고, 허가되지 않은 장면은 폐기할 것이라고 북한당국이 말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촬영 직후 비밀리에 북한 당국이 알 수 없게 최대한 많은 카피본을 떴고 북한 당국에 대한 제출본에는 70%정도의 촬영분량이 삭제된 상태로 제출했다"면서 "우리 촬영팀 계획대로 촬영할 수 없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 눈앞에 펼쳐진 거짓으로 연출된 모습 자체가 실제 북한의 모습 그대로의 '리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북한이 러시아 촬영팀에 제공한 시나리오에는 진미의 친구가 태양절 경축행사 준비 중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씬도 등장한다. 김정은에 의해 신축된 어린이 의료시설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체제선전 및 김정은 찬양을 위한 장면이다. 북한 당국이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거짓연극'으로 외국 촬영팀을 이용하려 했던 셈이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북한은 인류 앞에 자기 모습을 감추고 왜곡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찍는 홍보물을 만드는 것과 완전히 다른 문제"라면서 "북한에서 반인륜적 범죄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 이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북한의)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영화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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