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헤어롤은 어떻게 한국을 위로했나
<하재근의 닭치고tv>자기 책임 다할때 환호받는것은 당연
대통령 파면 선고 당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출근길의 머리모양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머리 뒤쪽에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외신은 역사적이고도 엄중한 순간에 나타난 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모습이어서, 재밌는 해프닝 정도로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단순히 재밌는 에피소드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청난 찬사가 쏟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너무나 비교됐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시시각각 배가 가라앉던 바로 그 순간에, 한 시간여 거리인 강남에서 미용사와 메이크업 전문가를 불러들여 머리모양과 얼굴 세팅을 했다는 분이 바로 직전까지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거의 날마다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이른바 올림머리를 했다고 한다. 얼굴시술을 받느라 수시로 시간을 소비했다고도 한다. 국가 최고통수권자가 시술 마취 때문에 정신을 잃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어쨌든 이런 의혹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 국민의 열패감이 커져갔다. 외모 관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듯한 사람을 이 나라의 지도자로 뽑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정미 헤어롤 사건은 이런 국민의 열패감을 위로해줬다.
헤어롤은 바쁜 여성이 간편하게 머리관리를 하는 도구로 1970년대부터 널리 사용됐다. 가격은 천 원 남짓이고, 세팅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전문가의 손길이 아닌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결정요지서 초안이 당일 새벽 3시에 나왔고, 이정미 재판관은 7시 50분에 출근했다. 발표 직전까지도 고심하며 초안을 검토하고 다듬었다고 한다. 그러니 머리 세팅 따위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간단하게 헤어롤을 말아놨다가 그것마저 잊어버려 카메라에 잡히고 말았다.
대한민국 지도자가 다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외모에 올인하지는 않는다는, 이정미 재판관처럼 자기 일에 전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 헤어롤이 말해줬다. 국격의 추락을 그나마 최소화했다.
이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서 여성들의 상실감이 컸다. 대통령이 공적인 책임을 방기하고 외모관리에 몰두한 듯한 인상을 주면서, 그것이 여성 일반의 특성으로 오인됐기 때문이다. 이정미 재판관이 일에 집중해 외모 관리를 잊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일하는 여성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특히 위로가 됐다. AP통신은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한 순간이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외모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외모에만 집중하는 사람을 대중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과거 ‘추노’에서 선녀화장 사태가 터진 것은 여주인공이 다른 추악한 등장인물에 비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품보다 자기 외모에 더 신경 쓰는 민폐 여주인공으로 지탄 받았다. 반면에 외모를 망가뜨려 연기한 성동일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대중은 외모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사람보다 자기 일, 자기 책임에 충실한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은 보통 타인에게 좋게 보이려는 욕망이 큰데, 정작 사람들은 거울을 자주 보는 사람에게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외모보다 자기 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이것이 이정미 헤어롤에 찬사가 쏟아진 이유다. 나라 밖에 나서서도 고도의 거울 세팅으로 세인을 놀라게 한 박 전 대통령이 이 점을 몰랐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몰랐기 때문에 완벽하게 세팅된 올림머리와 메이크업, 고도의 시술이 대한민국 민폐의 기억으로 남론가말았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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