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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우는 사연,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입력 2017.04.02 08:05 수정 2017.04.02 08:08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대가를 치러야하는게 바로 삶

목련이 열심히 꽃을 열고 있다. 낮부터 내린 실비에 몸을 씻은 채 이따금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겨 남실대고 있다.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노라니 바람을 핑계 삼아 부러 흔들어대는 것 같다, 흥이 난 모양이고 꽃의 춤이다.

이제 열흘 정도 지나면 벚꽃물결이 치고 비탈진 솔밭 그늘엔 연분홍 안개가 서릴 것이니 그건 진달래꽃이다. 그게 진정 무르익은 늦봄이다.

생각은 늘 앞서간다. 이제 겨우 늦봄으로 들어서건만 벌써 여름이 생각나니 말이다. 이쯤에서 물어본다, 봄과 여름을 경계 짓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 답은 이렇다. 어느 날 문득 뻐꾸기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면 그게 여름이다. 여름은 먼 산 뻐꾸기 울음소리로 시작이 된다. 그러고 나면 곧 들녘에서 하얀 찔레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 호호당은 올해 예순 셋인데 뻐꾸기 울면 여름이란 사실을 쉰 초반까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 전엔 뻐꾸기가 울면 우는가 보다 했다. 뻐꾸기가 왜 우는 지 그 사연에 대해서도 전혀 알 지 못했다.

뻐꾸기는 여름 철새라서 초여름이 되면 날아온다, 멀리서 날아와 바로 산란을 시작한다, 그러니 둥지를 지을 겨를이 없다,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그 바람에 얌체로 알려졌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렇다. 멀리 날아와 지친 몸에 초가을이 되면 또 다시 바로 떠나야 하기에 둥지를 틀고 산란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뻐꾸기이다. 그래서 탁란(托卵)을 한다.

알을 남의 둥지에 맡겨 놓았지만 어미 뻐꾸기는 새끼가 알에서 부화되고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늘 둥지 주변을 맴돌며 어미의 소리를 들려준다. 뻐꾸기가 우는 사연이 이러하니 그렇게 미움을 받을 새는 아니지 않겠는가.

이런 속사정을 얘기하고 나니 이어지는 생각이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젊은 엄마들도 많이 직장에 나가는 바람에 아기를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맡겨둔다. 그러니 뻐꾸기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최근의 젊은 엄마들을 일러서 뻐꾸기 엄마라고 부른다. 딱하구나 싶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식물이나 살아가는 일이 여간 고달프지가 않다. 큰 눈에서 보면 모두 딱하구나 싶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딱하다.

고급 아파트나 럭셔리 타운하우스 등을 광고하는 영상을 보면 푸른 초원이나 숲, 아니면 시원한 청람의 바다를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평화로운 대자연에 둘러싸인 집에서 힐링(healing)하라는 멘트도 으레 따라붙는다.

하지만 자연은 절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자연을 두고 평화롭다고 느꼈다면 그건 당신의 눈이 까막눈이란 뜻이다. 자연은 사시사철 처절한 투쟁의 공간이다. 응달에 가보면 여러 작은 나무와 풀들이 햇빛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고 양지 바른 곳의 큰 나무는 수시로 거센 바람에 시달리거나 덩굴이 타고 오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갖가지 동물들, 곤충에서부터 새, 덩치가 되는 네발짐승에 이르기까지 먹고 낳고 이어가기 위해 한가로이 쉬는 날이 없다. 바다 속 또한 마찬가지이다.

5월 하순 초여름 무렵에 들에 나가보면 더 없이 한적하다. 신록이 다 나오고 산들바람 불어 참으로 몸과 마음이 가볍다. 하지만 조금만 알고 나면 산과 들 그리고 개천 어디에서도 살아가고 이어가기 위해 조금치도 양보가 없는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게 엄청난 수고와 비용을 치르도록 한다. 삶은 그 자체로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가끔 공익광고에 보면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힘차게 뛰어노는 그림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허상(虛想)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그래야 한다는 당위 내지는 이념이다.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늘 싸우고 투쟁하고 있는 우리이기에 그런 공익광고를 보면서 내 새끼들은 응당 저러해야지 하면서 위안을 받고 힘을 낸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인간은 많이 특별한 동물이고 기술이 있어서 여느 자연의 생명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 역시 치열한 경쟁을 전제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의 생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경쟁보다는 협조, 홀로 차지하기 보다는 나눔이 이루어지는 사회, 유교적 이상으로 말하면 대동(大同)의 세상을 꿈꾸고는 있지만 그건 사실 여전히 요원한 이상이고 이념일 뿐이다. 공산주의가 처절하게 실패한 것을 보면 그건 어쩌면 불가능한 꿈일 수도 있겠다.

뻐꾸기로 시작된 얘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좀 더 얘기를 해본다.

현실의 공간은 투쟁이고 경쟁이니 그게 진리이고 답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영원히 투쟁하도록 틀이 지워져있긴 하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가련하다는 점이다. 더불어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예쁘다는 점이다.

창 아래 한창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목련꽃만 해도 얼마나 예쁜가 하는 말이다. 먼 산을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진달래꽃 또한 얼마나 예쁘고 슬픈가 하는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사실 나이 쉰이 되는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정말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만 잘 되면 되지 하는 마음에서 내 앞길만 보고 살아왔으니 너른 세상은커녕 가까운 주변마저도 보는 눈이 얼마나 협소했겠는가 싶다.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

봄날 피어나는 꽃들이 올해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살자고 피는 꽃이다 싶으니 말이다. 예쁜지 안 예쁜지는 다음다음 일이고 우선은 살자는 몸짓이다.

나무가 꽃을 피워내지 않으면 그건 죽은 나무라 하겠고 사실 죽게 된다. 나무인 까닭에 어떤 소리를 내진 못하지만 겨우내 그리고 초봄부터 꽃을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저 올해에도 살아보자는 몸짓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랴!

왜 사는가? 하고 삶의 이유를 묻는 이가 있다면 그건 중2병 환자이다. 살 이유가 없다 싶어서 자살하려고 한다면 그건 우울증 환자일 뿐이다.

삶이란 것은 어떤 이유를 따지고 알아볼 필요가 없다. 그저 살아보는 것이고 이어가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깃든 본능 속에는 무조건 살아야만 한다고 프로그램이 되어있으니 그렇다.

그런 까닭에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이 공통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 같다.

다만 사람은 다른 생명체가 잘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그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젊어선 자신의 죽음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그저 남의 일이거니 한다.

이에 대해 나 호호당이 생각하는 게 있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결코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 어떤 이야기나 소설도 끝이 있듯이, 또 끝이 나지 않으면 이야기나 소설이 될 수 없듯이 우리의 삶 또한 항상은 아니라 해도 수시로 이따금씩 죽음이라고 하는 삶의 엔딩을 염두에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끝을 전제하지 않을 것 같으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가 아예 성립될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끝이 있기에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감 날자가 정해지지 않은 일은 으레 흐지부지된다. 우리의 삶 또한 마감일지가 이 날이다 하고 정해져있지는 않다 해도 분명히 마감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런 마감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그건 삶을 낭비하고 허투루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오래오래 잘 살겠다는 생각? 물론 중요하다, 바람직하다. 그 사이에 부귀와 영화까지 누릴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마감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된다.

작업실 창 아래 저 목련이 지금 꽃을 피움으로써 바야흐로 영화(榮華)를 누리고 있지만 저 꽃? 며칠 가지 않아 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봄날 피는 저 목련의 유백색 꽃이 내게 또 다르게 다가온다고 얘기한 것은 나 호호당의 삶이 한 해 줄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살아가려면 대가를 치른다. 대가를 치러야하기에 삶은 고달프다. 그게 정상이다. 먹고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말이다. 하지만 따지지 말고 살고 볼 일이다. 언젠가 다가올 마감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더욱 알차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각오를 새기게 된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www.hohodang.com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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