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이기주의는 지양하되 공동체주의는 지향해야
"나를 먼저 알아야"…공동체주의 교육에 앞서 '정체성 교육'부터
"나를 먼저 알아야"…공동체주의 교육에 앞서 '정체성 교육'부터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존중, 배려, 소통 등의 기본가치가 바로선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이런 가치들을 중시하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사회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합가치포럼'을 운영해왔다.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을 엮어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일곱빛깔 무지개'를 펴냈고, 데일리안과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이러한 가치를 국민들과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매주3회, 총 27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주 >
'공동체'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생활 운명을 같이하는 사회 집단, 종족 조직을 근간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연 공동체, 종교나 이념 및 기타 정신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결사 공동체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혈연 공동체와 지연 공동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혈연 공동체는 가족이 확대돼 특정 성씨를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어 형성된 종족 조직을 기반으로, 제사·위토(位土)·족보·사당 등을 운영함으로써 유지되었다. 지연 공동체는 불안한 자연 환경으로 인하여 이웃을 서로 결합시키는 가장 단순한 형태가 보다 확대되면서 일정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를 형성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조사 사업과 강제적인 행정 조직 개편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다. 즉 이전에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던 촌락이 둘 또는 셋으로 분리되거나, 여러 개의 공동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등 폐쇄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8·15해방 후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 등 농촌의 붕괴는 공동체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공동체적 요소는 부분적으로나마 아직 남아 있다.
자신들 주장이 더 큰 공동체에 어떤 손익을 끼치는가
그런데 사전의 설명과는 달리 요즘은 새로운 공동체가 더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온라인 네트워크의 발전에 힘입은 현상이다. 소식이 끊겼던 동창도 온라인 덕분에 다시 만나고 카톡은 그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해준다. 요즘 생겨나는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해당 공동체만의 이기적 목표를 위해서는 단합이 잘 된다는 것이다. 또 님비 현상과 같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집단 이기주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주의다. 위 사전의 설명을 참고하면 어차피 공동체는 '사회 체계에서 비롯된 압력 그리고 국가와 같은 보다 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압력 등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또 '구성원들의 사회적·문화적 생활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한 결과 형성되었기 때문에 폐쇄성이 짙다' 이런 특성을 고려한다면 공동체주의가 폐쇄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다른 말로 쓰인다 해도 이를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같은 말로 여기지는 않는다. 집단 이기주의는 지양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지향한다.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의 경계는 어느 지점에 있을까? 애매하다. 애국심이라는 의심할 바 없는 공동체주의의 덕목만 보더라도 나라 바깥에서 본다면 국가 이기주의로 보일 수 있다. 어디까지가 공동체주의이고 어디부터를 집단 이기주의라고 볼 것인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경계를 생각하면 찾을 수 있다. 개인이 스스로를 위해 하는 행동이 개인보다 더 큰 조직인,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는가가 그 경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주의가 집단 이기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들의 주장이 그 공동체가 속해 있는 더 큰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지자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인 해당 지자체의 이익을 위해 단합할 수 있다. 그때 자신들의 주장이 해당 지자체가 속해 있는 더 큰 공동체인 국가의 이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더 큰 공동체의 이익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이는 그냥 공동체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 큰 공동체 혹은 다른 공동체가 피해를 입는다면 이는 집단 이기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나를 먼저 알아야"…공동체주의 교육에 앞서 '정체성 교육'부터
왜 우리는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살펴야 하는가? 너무 커서 당장 우리 눈앞에 다가오지는 않지만 나 자신도, 내 눈 앞에서 이익을 논하는 작은 공동체도 더 큰 공동체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더 큰 공동체에 손해를 입히는 작은 공동체의 당장의 이익은 장기적으로는 해당 공동체 일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자신들이 속한 더 큰 공동체나 주변의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파는 머지않아 자신들에게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가 진정으로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뤄지고 그것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장려되려면 더 큰 공동체를 볼 줄 아는 안목도 함께 길러져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이 동심원으로 이뤄진 여러 겹의 공동체 속의 어느 부분에 속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넓은 안목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동체의 이익을 이야기할 때 그 공동체를 둘러싼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을 살필 수 있게 해야 한다. 보다 넓은 공동체를 살피고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는 교육은 바로 '정체성 교육'이다. 공동체주의를 논하려면 정체성 교육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동체주의를 가르치면 자칫 집단 이기주의자의 양산 체제를 갖추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공동체 교육과 정체성 교육은 앞뒤를 구분할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글/황인희 통합가치포럼위원
△주요 약력
·현직 : 두루마리역사연구소 소장
·학력 : 이화여대
·경력 : 한국출판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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