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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과 함께 한 대우그룹 30년 흥망사


입력 2019.12.10 10:16 수정 2019.12.10 10:28        이홍석 기자

1967년 대우실업으로 시작...70~80년대 압축성장 표본

1998년 41개 계열사와 임직원 30만명 거느린 재계 2위

IMF로 경영환경 악화에 무리한 차입경영으로 내리막길

1967년 대우실업으로 시작...70~80년대 압축성장 표본
1998년 41개 계열사와 임직원 30만명 거느린 재계 2위
IMF로 경영환경 악화에 무리한 차입경영으로 내리막길


대우그룹 로고.ⓒ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설립한 대우그룹은 30여년간 그의 굴곡과 흥망을 함께 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우그룹은 1970~80년대 압축성장을 해 온 한국경제의 명과 암을 보여주는 대표 대기업 그룹사였다.

대우그룹은 지난 1967년 3월22일 대우실업이 창업하면서 시작을 알렸다. 당시 만 30세였던 김 전 회장은 섬유수출 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다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회사를 창업했다. 대우(大宇)라는 회사 이름은 함께 창업한 도재환씨의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에서 대를, 자신의 가운데 이름에서 우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와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로 알려지면서 김 전 회장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김 전 회장의 행보도 바빠졌다. 수출 주도의 고도 성장기에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다계열·다업종으로 확장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신성통상·동양증권·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다.

이어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지난 1974년 설립한 대우전자는 1983년 인수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 주력 계열사로 키웠다.

김 전 회장은 대우실업 창립 15주년을 맞아 1982년 대우실업을 (주)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그룹의 상징이자 사옥이 됐던 서울역 대우센터 빌딩은 앞서 지난 1977년 지상 23층 규모로 완공됐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의 대기업·수출 중심의 진흥 정책과 김 전 회장의 확대 경영 전략이 맞물리면서 대우그룹은 1970~80년대 눈부신 성장을 거뒀다”며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이었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에서는 성장·확대 위주의 전략을 유지하면서 시선을 해외로 돌렸다. 지난 1993년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적극 나섰다. 또 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하기도 했다.

대우그룹은 성장세를 구가하며 한때 재계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쌍용차를 인수하면서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2위 대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10만5000명, 해외사업장 21만9000명으로 임직원이 30만명이 넘었다.

3개 그룹사 모두 기반을 갖춘 상태에서 해방 전후에 시작했던 것과 달리 출발이 늦었고 샐러리맨에 불과했던 김 전 회장으로서는 혁혁한 성과로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하지만 거침없는 성장을 거듭하던 대우그룹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인한 경영환경 악화와 무리한 차입경영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면서 사상누각이 되고 말았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다보니 다른 그룹들에 비해 구조조정이 한 발 늦었던 점도 타격이 커진 이유로 작용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이후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대우그룹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맞았다. 이어 이듬해 8월에는 12개 주요 계열사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으면서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법칙도 깨졌다.

여기에 2000년에 수십조원 규모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대우그룹은 국내 경제 성장과 수출 확대에 크게 기여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국가 경제를 휘청이게 하고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히는 등 공과를 모두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홍석 기자 (redston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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