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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원의 정치공학] "파사현정" 입에 담다니…문대통령의 삿된 인식


입력 2020.09.21 07:00 수정 2020.09.21 05:18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불교 지도자 "적폐청산 부담이란 국민들 많다"

문대통령 "'파사현정' 불교계, 반대는 않을 것"

일제 총독도 '듣는 자리'여서 대꾸는 안했는데

불교 지도자 면전서 '파사현정' 강론이 놀라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불교 지도자 초청간담회에서 13개 종단 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불교 지도자 초청간담회에서 13개 종단 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1937년 3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당시 조선 불교를 대표했던 31본산 주지스님들을 총독부로 불러들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며 불교계 지도자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 총독은 "승려들의 도성 출입조차 금지될 정도로 조선 불교가 쇠잔해 있었는데,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전 총독이 이를 허하고 사찰령을 제정해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조선시대 때 불교를 억압했던 유교를 일응 탓하면서 "앞으로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가 통합해 더욱 큰 진흥을 이뤄야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 때 31본산의 하나인 충남 마곡사의 주지로 만공스님이 있었다. 이간과 협잡의 의도가 뻔한 미나미 총독의 발언 중에 금강경을 독송하던 만공스님은 "조선 불교를 망친 데라우치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며 "데라우치가 지은 죄를 제도하려면 부지런히 경을 외워도 부족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8일 청와대로 불교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태고종 총무원장 호명스님, 천태종 총무원장 문덕스님 등 불교계를 대표하는 13개 종단 지도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정치에서 갈등이 증폭되다보니 심지어 방역조차 정치화됐다"라며 "방역 협조를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얼마전 8·15 대정부 광화문집회를 주도했던 기독교계 일각을 탓했다.


그러더니 "통합은 절실한 과제"라며 "통합된 정치를 위해 나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했던 유교를 탓하며 불교계의 호응을 유도했던 미나미 총독마냥 문 대통령은 불교 지도자들 앞에서 기독교계를 탓하며 통합을 말한 것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스님이 "적폐청산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불교계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이 있는 만큼, 불교계도 적폐청산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정치 지도자가 종교 지도자들을 굳이 불러들이는 이유는 여론을 듣기 위함이다. 서슬 퍼렇던 미나미 총독도 만공스님의 일갈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13개 종단 지도자들 앞에서 "파사현정"을 논했다. 이들이 '파사현정'이 뭔지 몰라서 문 대통령에게 법문을 청하러 갔겠는가.


파사현정, 양극단 치우침 극복해야한단 가르침
내편이 정(正)이고 네편은 사(邪)니까 적폐로
몰아 청산해야한다는 소인배 행태의 근거 아냐
여론 전한 것조차 적폐로 몰릴까 두려운 세상


현 정권이 파사현정을 적폐청산의 근거로 끌어대려 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6월 대한상의에서 열린 공수처 공청회에서 "파사현정"을 운운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예방했을 때, 적폐청산 수사를 하라며 붓글씨로 '파사현정'을 써서 선물하기도 했다.


파사현정은 중국 수나라 때의 길장스님이 '삼론현의(三論玄義)'에서 대승불교의 요지를 설명하며 펼친 개념이다. 파사현정은 편가르기를 해서 한 편이 상대편을 깨뜨리라는 진영논리가 아니다. 양극단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버리고 중도를 드러내라는 뜻이다. 길장스님도 "중론(中論)이 바로 대승의 실리"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파사현정은 결코 상대편은 사(邪)고 내편은 정(正)이어서, 정인 '내편'이 사인 '상대편'을 '적폐몰이'해 청산해야 한다는 소인배 짓거리에 갖다붙일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교 13개 종단 지도자 앞에서 파사현정을 강론한 문재인 대통령의 호기로움이 놀랍다.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 비판 글을 네이버 카페 '부동산 스터디'에 올린 평범한 30대 주부 '삼호어묵'은 "정부 비판하는 내용이다보니 신상을 밝혔다가는 불이익을 당하고 가족에까지 해가 미칠 것 같다"라며 "남편은 내가 잡혀가면 '애기 엄마 돌려달라'고 천막을 치고 농성하겠단다"고 토로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을 공익제보한 현모 씨도 '적폐'가 됐다. 평범한 20대 청년을 상대로 집권여당 의원이 "단독범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철저히 수사해 뿌리 뽑아야 한다"고 겁박하는 세상이 됐다.


"적폐청산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다"는 여론을 전한 것은 현세의 만공스님과 같은 용기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적폐'로 몰리기에 부족함이 없을까봐 두렵다.


총독부에서 31본산 주지회의를 소집했던 미나미 총독도 자신에게 일갈한 만공스님을 어떻게 해꼬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별 게 다 무서워지고 걱정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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