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구호 식상해진 지 오랜데…
억지 쓰면 법을 이길 수도 있다?
오만한 권력 행사 반작용 부른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도 불법적 위법적 방법으로 그걸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 절차적 적법성 합법성 보장이 법치의 요체 가운데 하나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긴급출국 금지조치가 적법하지 않게 작성된 요청서에 의해 행해졌다. 검사장 관인이 없었고 엉터리 사건번호가 기재돼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불법행위다. 상황 목적을 명분으로 정당한 행위였다고 우겨대는 행위 자체도 위법한 주장이라 할 수밖에 없다.
‘개혁’ 구호 식상해진 지 오랜데…
그런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검찰이 이 사건 관련 특별수사팀을 꾸린 데 대해 “전형적인 ‘극장형 수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비난했다.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사라는 의미이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검찰과 법무부(지금의 친추親秋 검사들) 망신을 주고, 이 사건 수사의 정당성까지도 의심케 하려는 의도라고 여기는 것 같다. ‘김학의 사건’에 대한 엄정한 재수사를 지시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까지 파장이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섞였을 법하다.
법무부도 덩달아 추 장관을 거들었다. 그때의 출국금지는 정당했다면서 “만일 긴급 출국금지 요청이 없었다면 장관 직권으로라도 했을 것이며,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김 전 차관의 유무죄와는 상관없이 당시 출금 과정은 불법이었다. ‘장관의 직권’으로도 그게 가능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후적 합리화일 뿐이다.
추 장관과 법무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분명하다. 일부 보수 언론과 대검찰청(그러니까 윤석열 검찰총장)의 행태는 ‘국민이 원하는 검찰개혁에 반한다’는 것이다. “개혁의 대의 앞에서 적법성 따위를 따지다니!” 이런 식으로 되레 을러대는 형국이다. ‘개혁’이라는 구호가 식상한 느낌을 준 지 오래다. 차라리 “잔소리 마라, 혁명이다”라는 건 어떨까?
유사한 억지는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의 경우에서도 보인다. 그는 선거 당시에도 당선 이후에도 경찰관이었다.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이 출마할 경우 90일 전에 그 직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공무원 신분으로 공천 신청을 했고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였다. 경찰청은 의원임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작년 5월 29일 ‘조건부 의원면직’이라는 괴상한 방식으로 그의 의원직을 지켜줬다.
억지 쓰면 법을 이길 수도 있다?
황 의원은 자신의 명예퇴직을 신청했지만, 경찰청이 허락하지 않은 탓이라고 주장했다. 울산시장선거 불법 개입 의혹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청으로서는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그게 법의 규정이다. 그때의 황 의원으로서는 억울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과 경찰청 사이의 문제이지, 공직선거법이 거기에 구속될 것은 아니다.
정권 주도 세력에게 검찰개혁은 검찰 무력화다. 아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그의 검찰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원한 때문일 듯하다. 지금의 정치인들에게도 검찰은 거북하게 마련인 집단이다. 그래서 검찰을 아주 완벽히 짓뭉개놓겠다는 데 의기투합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황 의원도 이런 분위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하겠다.
이 사람들 “앞문으로 들고양이를 쫓아내면 뒷문으로 스컹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D 톰슨 편, 근대정치사상)는 속담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검찰을 ‘공소청’으로 만들고 수사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경찰에게 맡기면 개혁이 된다고 누가 보장해 줬는가. 이 구조의 위험성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아마 곧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끝없이 개혁을 떠드는 것은 우선 검찰이 거슬리고 윤 총장 망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심사 때문으로 여겨진다. 문 정권의 개혁 대상은 검찰뿐만 아니라 구정권의 제도 관행 행태, 그리고 그 시절 행세깨나 했던 사람들 모두다. 혁명정부가 등장했으니 구시대적인 것은 무엇이든 둘러 엎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이냐에 대한 계획이나 구상이 없었다. 문 정권 개혁의 희화성(戲畫性)이 여기에 있다.
문 정권 사람들은 구정권의 반대로만 하면 ‘혁명’이 될 것으로 생각했음 직하다. 그래서 출범하기 무섭게 ‘적폐청산’의 기치를 내걸었다. 사실 이들이 새롭게 만든 것이 있다면 그 첫째가 ‘적폐청산’ 구호다. 그리고 ‘소주성(소득주도성장)’ ‘공수처’ ‘연동형비례대표제’ 등도 혁명 과제의 물목에 올렸다.
구정권과 과거에 대한 맹목적 부정 매도 척결로서의 개혁이 성공할 리가 없다. 건드리는 것마다 뒤틀어진 게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작년 21대 총선에서 집권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고, 문 대통령에 대한 여론 지지율도,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양호한 편이다. 구정권이 인기를 잃은 반사효과라고 하겠다.
오만한 권력 행사 반작용 부른다
여기에 ‘김현미 효과’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2019년 3월 교체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최정호 후보자가 부동산 문제로 자진사퇴하는 바람에 유임되어 후임 변창흠 장관이 지난해 12월 29일 임명장을 받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설마 추 장관이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을 잘하든 못하든 운만 좋으면 성공한 정권이 된다는 믿음을 정권 핵심부가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난도질 정치를 계속할 리가 없다. 가만두면 그럭저럭 굴러갈 일을 꼭 건드려서 사달을 내고 만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특히 주택정책이다. 나름대로 형성된 시장의 질서를 깨뜨려버린 바람에 집값, 전셋값 폭등만 불렀다. 북한 김정은에 대한 과공(過恭)이 조롱 모욕 위협으로 되돌아왔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면 그게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소득주도성장의 신화가 괴담으로 전락했다(예컨대 지난해 사업장 폐업·해고 등 강제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200만 명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인재(조국 전 법무부 장관) 보호에 너무 집착했다가 1년 이상 대통령이 검찰총장과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것은 일부의 예일 뿐이다.
나름의 장기도 있다. ‘우겨대기’가 그것이다. 이들은 무엇이든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고 주장한다.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라는 이상한 자기 신뢰, 자기애에 빠져 있다. 더는 억지를 부릴 수 없을 때는 남 탓으로 돌려 버린다(탈원전 정책이 삐걱거리자 최재형 감사원장을 탓하는 식으로).
조 전 법무부 장관이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법적 과오가 재판으로 확인된 후에도 여전히 결백을 주장하며 검찰과 보수언론을 비난한다. 그의 딸이 지난 14일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고 알려졌다. 상식인이라면 자중할 일이다. 그런데 그다음 날 누군가의 축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고마와요”라는 큰 글씨 아래 우쿨렐레를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이 사람의 행실과 현 정권의 행태가 어쩌면 이처럼 판박이일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