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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메모리즈⑮] 전화기 너머 전노민, ‘결혼작사 이혼작곡’ 보다가 떠오른 목소리


입력 2021.02.05 10:43 수정 2021.02.05 10:43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전노민 ⓒ 이하 '결혼작사 이혼작곡' 홈페이지 영상 캡처

“저기, 우리, 이만 사는 거 어때.”


어느 날 30년을 함께한 배우자에게서 이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정이라도 남아 있는 부부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일 것이다. 아내가 손목에 파스 붙여 가며 라디오작가 일해서 남편을 뒷바라지해 왔고, 그러면서도 육아며 집안일을 소홀함 없이 책임져 왔다면, 그리고 저 말을 하는 사람이 남편이고 아내는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자려고 세수하고 스킨로션 바르다가 들었다면 어떠할까.


박해륜 “저기, 우리, 이만 사는 거 어때.” ⓒ

분명 숱한 ‘아줌마’가 내 처지는 뒤로 미루고 마치 내 일처럼 공분해야 마땅한데, 필자도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일까. 이쯤 살아보니 아내 마음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남편 아내 구분을 떠나 세상살이를 조금은 알게 된 영향도 있겠지만, 이 대사가 맡겨진 배우가 전노민인 이유, 이 충격적 발화를 소화해 깊은 한숨처럼 토해낸 연기의 영향이 컸다.


드라마의 첫 등장이었다.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버거운지, ‘반백 년’이라는 나이가 얼마나 버티기 힘든지 배경설명을 줄줄이 깐 뒤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 첫 대사다. 그런데 말하기 전에 한 모금 들이키는 와인, 어구와 어구 사이마다 들이키는 한숨 끝에 내뱉는 말을 듣노라니 분노보다 공감의 마음이 일었다. 듣는 상대가 안중에 없는 말임에도 삶의 무게와 고민의 부피가 느껴졌다. 세상이 하시(下視)의 뉘앙스를 담아 부르는 ‘아줌마’인 우리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 힘겨운 인생살이인 것을 상기시켜 ‘남자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밀고 들어왔다.


"굳이 이유라면 우리 너무 오래 살았다는 거" ⓒ

“시은아, 나 떠나면 안 될까. 당신한테서. 고만 살았으면 해. 그냥 그러고 싶어. 우리 열아홉 때 만나서 31년이야, 햇수로. 그만 살자 … 나 앞으로 몇십 년 이렇게 똑같이 살고 싶지 않아… 미안해. 힘들었어, 언제나 맞춰 줬어, 나한테. 이번에도 그래 주면 안 될까? 염치없다, 정말. 그냥 좀 부탁이야. 이제까지와 다르게 살고 싶어. 굳이 이유라면 우리 너무 오래 살았다는 거. 부모 자식 인연도 30년 이쪽저쪽 끝나.”


주고받는 호흡이 좋았던 아내 이시은(전수경 분)의 말을 뺀, 남편 박해륜의 말만 추렸다. 이 말을 듣기 전에 분명 첫 장면의 공감을 깨는, 분노를 부추기는 장면이 있었다. 아내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괴로워하던 박해륜이 누군가와 메신저로 얘기를 나눴다. 대화명 ‘이 선배’라는 누군가. 여자 생겼냐는 아내의 말에 두 번 고개를 저었기에, 어쩐지 믿어지는 그였기에 시청자 사이에서는 ‘이 선배’가 남자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온 남자의 고뇌로 받아들여질 만큼 한숨 깃든 “저기, 우리, 이만 사는 거 어때”의 파급력은 컸다.


어찌 됐든 ‘누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청자는 박해륜에 대한 공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래주점에서 아내가 부르라는 노래는 부르지도 않고 “우리 열아홉 때 만나서 31년이야, 햇수로. 그만 살자”로 한 방 날리고, “굳이 이유라면 우리 너무 오래 살았다는 거. 부모 자식 인연도 30년 이쪽저쪽 끝나”로 결정타를 날렸다. 천륜인 자식도 성장과 독립, 결혼 속에 30년 안팎 즈음부터 따로 살고 각자의 인생길을 가는데 남이었던 우리가 30년을 넘겼다, 그러니 그만 살자. 참 얄미운 말인데, 어리둥절할 정도로 다시 공감의 금을 메우는 접착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살고 싶어”라는 말은 다시 한번, 남성 교제설을 태우는 연료가 됐다. 배우 전노민이 빚어낸 반전이고 상상의 나래다.


“뜻대로 돼야지, 맘처럼. 남 얘기 쉬워” ⓒ

멀리 가지 않고 사실은 확인됐다. 쌍둥이인 박해륜, 죽은 형의 친구인 한의사 조웅(윤서현 분)과의 대화에서다. 1년쯤 된 애인이 있다. 아, 아내에게서 떠나고 싶었던 게 “우리 너무 오래 살아서”만은 아니었구나, 누군가 있었구나! 그런데 아직도 확실치는 않다. 조웅은 ‘애인’이나 ‘누구’라고 말했고 박해륜은 그에 수긍했지 아내가 물을 때처럼 ‘여자’라고 표현되지 않았다. 이렇게 억지를 써가며 여자 생겼냐는 아내의 질문에 저었던 고갯짓을 믿고 싶어 하고, 누군가 있다는 고백에도 “너한테서 떠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거창한 말이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두 배로 분노하는 게 아니라 진심의 일부였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건, 전노민이 풍기는 아우라 때문이다. 대사도 잘 썼고, 연출도 좋지만, 배우 전노민의 색과 향 덕에 가능한 믿음이고 동조다.


어쩌면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한 오판, 혼자만의 드라마 감상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전노민 표 박해륜에 공감지수가 높아진 일화가 있었다. 지금은 종영된 MBN 예능 ‘아주 궁금한 이야기, 아궁이’에서 연예인들의 사업 도전에 관해 다룬 때였다. 여러 이야기가 다뤄졌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노민의 막걸리 사업이었다. 당시 전노민은 사업 실패 뒷수습으로 TV에서 볼 수 없었던 때였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스타의 얘기를 방송에서 하는 것에 심적 부담이 적잖았다. 소속사가 없는 상태라 배우 개인 번호가 필요했고, 여러 루트를 거쳐 확보했는데. 활동 중이라면 직접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남기겠는데 좋은 상황이 아니다 보니 조심스러웠다. 해서 후배 배우를 통해 필자의 번호를 전하고, 전화를 주시면 좋겠다고 전갈을 남겼다.


전화기 너머의 전노민, 목소리 그리고 문장 ⓒ

전화가 왔다. 짧지 않은 통화 속에서 몇 가지 느낌이 또렷했다. 우선 사업가로서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부정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다만 흔히 말하는 ‘바지사장’으로 이름 빌려주고 돈 벌고자 했던 건 아니라는 점, 생산부터 판매까지 직접 뛰어다녔던 사실만은 말하고 싶어 했다. 왜 배우로 복귀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실패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한 마무리를 통해 자신을 믿었던 분들의 피해를 가능한 줄이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뻔한 질문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사업을 하려고 했나요. 연예인의 불안정한 수입, 안정적 삶의 기반이라는 답을 자주 들어왔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기자에게 굳이 안 해도 되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김보연 씨가, 이제는 다시 선배님이네요, 제게는 너무 크게 느껴졌어요. 그분에 걸맞은 남자가 되고 싶었어요. 제 그릇을 생각지 못한 욕심이었나 봐요”. 사랑이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필자이기에 그 대답이 더욱 크게 가슴을 울렸는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느낌은 ‘배우 전노민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구나’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내 귀에 캔디’라고 하던가, 꿀 바른 성대라고 하던가. ‘아, 이래서 배우 하는구나’ 싶었다. 네 번째 느낌은 문장이 좋다는 거였다. 통화해 놓고 문장이라고? 직업병일 수 있는데, 사람 말을 들을 때 문장 구성에 유념한다. 어휘 선택과 문장 표현, 그 흐름, 문맥을 기억하면 글로 옮기기가 쉬워서인 듯하다. 쉽지 않은 얘기이고 밝지 않은 얘기인데, 전노민은 담담히 밝혔고 아무리 긴 문장이어도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정확했다.


나이 들수록 멋있는 배우, 박혜륜에서 '확인' ⓒ

몇몇 단어의 발음도 정겨웠다. ‘결혼작사 이혼작곡’에서도 ‘그만’을 “고만”으로, ‘이유라면’을 “이유래면”이라고 말하는 게 딱딱하게 느껴지는 교수라는 직업과 아내 가슴에 대못 박는 이기심에 미워할 수만은 없는 정겨움을 보탠다. 띄어 말하는 호흡도 좀 독특했다. 잘못 들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어요’가 될 수도 있는 터라 더욱 집중해서 듣게 했다. 드라마에서도 그렇다. ‘빨리 정리하라’는 조웅의 말에 보통은 “뜻대로 돼야지, 맘처럼. 남 얘기 쉬워”라고 두 문장으로 말할 텐데, 전노민은 “뜻대로 돼야지…맘처럼…남 얘기 쉬워”라고 말한다. 미묘한 차이지만, 애인을 정리하라는 조웅의 말에 대한 대꾸인지, 정리가 내 뜻대로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어서 아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혹은 양쪽에 걸쳐진 말인지 묘하다. 단순한 말일 수 있는데, 그 뜻 간파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결혼작사 이혼작곡’에 배우 김보연도 출연한다. 필명 Phoebe으로 작업한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여서 가능한 낯선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으로 만나 나쁘지 않게 헤어져 다시 동료가 된 두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일 터. 예능 ‘우리 이혼했어요’에서의 재회보다는 좋지 아니한가.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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