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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㉟] 20세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의 ‘고독한 영혼’


입력 2021.03.22 00:00 수정 2021.03.22 01:45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고독한 영혼' 포스터 ⓒ이하 'DAUM' 영화정보

1999년, 한때는 지구가 멸망하리라고 예언됐던 연도다. 새로운 천년, 뉴 밀레니엄(2001~3000년)은 분명 2001년에 시작함에도 1년 뒤년 앞자리가 ‘2’로 바뀌어선지, 1999년은 세기말 기운이 역력했다. 컴퓨터가 2000년이라는 연도를 ‘00’으로 인식하면서 벌어질 Y2K 문제, 밀레니엄 버그에 관한 우려도 세기말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뭔가 20세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야 할 것 같았던 그때, 미국영화협회가 20세기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남녀 각 25인을 발표했다. 남자 배우 25인의 면면을 보면 캐리 그랜트, 그레고리 펙, 말론 브랜도, 클라크 게이블, 프레드 아스테아, 챨리 채플린, 헨리 폰다, 개리 쿠퍼, 존 웨인, 진 켈리, 제임스 딘, 버트 랭카스터, 버스터 키튼, 로렌스 올리비에 등 대배우들이 포함됐다. 1980년대 이후 활약한 젊은 배우들이 없어 아쉬움을 낳기도 했지만, 21세기에도 이름을 빛낼 그들의 미래를 응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대망의 1위는 험프리 보가트였다. 온화한 신사의 대명사 캐리 그랜트가 2위인 것에 비춰 보면 20세기 남자의 전형이라 할 만한, 마초이면서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나쁜 남자’ 이미지에 적격인 데다 출중한 연기력 덕분이다.


강렬하면서도 텅빈 고독을 지닌 험프리 보가트 ⓒ

오늘 소개할 영화 ‘고독한 영혼’(1950)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잘나가는 할리우드 시나리오작가 딕슨 스틸을 봐도 그렇다. 딕슨에게는 친구가 없다. 말재간은 넘치나 재미는 없는 냉소적 유머로 다른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일상, 휴대전화도 없는 1950년인데 전화기가 울려도 받지 않기 일쑤, 화가 나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상대가 누구든 주먹이 앞선다. 유일하게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있으니 에이전트 멜(아트 스미스 분)이다. 20년간 딕슨의 괴팍한 성격에 맞추고 달래며 함께 일해 왔다. 누구보다 분석적이고 글을 잘 쓰고, 속마음에 비열함 대신 거짓과 속임, 무례에 흥분하는 정의감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딕슨이 너무 똑똑해서 상대의 거짓과 속마음을 너무 금세 알아챈다는 것, 가는 곳마다 주먹다짐 일보직전이다.


그날도, 멜은 유명 흥행감독이 물품보관소에 맡긴 소설책을 평가해 달라고 딕슨에게 재촉한다. 딕슨이 괜찮다고 하면, 시나리오 작업을 맡길 요량이다. 하지만 딕슨은 읽기가 싫다. 승강이가 벌어질 그때, 보관소 여자 직원 밀드레드 액킨슨(마샤 스트워트 분)이 몇 페이지 남지 않았으니 책을 마저 읽고 딕슨에게 주면 안 되겠냐며 부탁해 온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딕슨, 밀드레드에게 자신의 집에 가서 책 얘기를 해달라고 한다. 유명 작가에게 책 이야기 들려준 경험을 함께사는 고모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뜬 밀드레드,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약속을 미루고 딕슨의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후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딕슨이 보이는 행동, 그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밀드레드의 행동에 험프리 보가트의 지배적 이미지가 활용된다. ‘난 원래 일은 집에서 한다’는 딕슨의 말에 따라 집으로 오긴 했지만 여자는 코트조차 벗지 않고, 자리에 앉지 않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딕슨은 일 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잠옷 가운으로 갈아입는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재킷을 벗어 던지고…밀드레드는 긴장한다. 딕슨은 ‘난 원래 일할 땐 편하게 입는다’고 말한다. 밀드레드가 그 말을 믿고 안심하기가 무섭게 딕슨은 술을 권한다. 원래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여자. 이내 여자를 안심시키는 딕슨의 화술과 무덤덤한 행동에 코트를 벗고 ‘레몬을 넣은 진저에일’을 청한다. 남자는 같은 공간을 벗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 곁에 앉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여기서도 들리니 소설의 스토리를 계속 얘기하라고 말한다. 여자가 되레 조금이라도 방쪽으로 다가가 열심히 스토리를 전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남자는 여자를 내쫓듯 집에 가라고 한다. 택시비를 넉넉하게 주기는 하되 택시를 불러주지도 승강장까지 데려다주지도 않는다. 그리곤 잠에 빠져든다.


배우 험프리 보가트, 마샤 스트워트, 글로리아 그레이험(왼쪽부터) ⓒ

뭔가 일을 벌일 듯, 여자를 유혹할 듯 조마조마 지켜보게 하는 건 험프리 보가트가 지닌 마초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다 아무 일 없이 여자를 보내는, 집 밖 배웅조차 하지 않는 비신사적 행동에서 도리어 안도와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건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지닌 힘이다.


‘밀당’의 순간 뒤에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살해사건이라는 충격파를 안긴다. 자정 즈음 왔다가 30분 만에 집을 떠난 밀드레드가 새벽 1~2시 사이에 죽임을 당한다. 제1 용의자로 몰리는 딕슨. 제2 용의자는 밀드레드의 애인 헨리 켄슬러(잭 레이놀즈 분). 헨리에겐 한밤중에 파이를 가져다줬다는 어머니,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는 아버지가 있지만 혼자 사는 딕슨은 곤경에 빠진다.


이때 얼마 전 이사 온, 마당 건너 한 울타리에 사는 로렐 그레이(글로리아 그레이험 분)가 목격자이자 딕슨의 알리바이가 되어 준다. 함께 들어가고, 여자 혼자 나왔다고 증언한다. 어떻게 유심히 지켜보았느냐는 로츠너 경감(칼 벤톤 레이드 분)의 질문에 로렐은 “그의 얼굴이 좋아서”라고 답한다. 대담하고도 솔직한 로렐의 말에, 딕슨은 살인사건 용의자로 조사받는 중임에도 한눈에 반한다. “어떻게 나 같은 얼굴을 보고 좋다고 하느냐” 시니컬 하게 말하면서도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여자를 기다려 왔다, 이제 만났다”며 무섭게 빠져드는 딕슨. 배우를 지망하지만, 소설과 시나리오 분석에 더 큰 재능을 보이는 로렐은 딕슨의 재능에 빠져든다. 역시나 험프리 보가트의 거친 매력이 있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로리아 그레이험의 아름다우면서도 비밀스러운 깊이가 더해져 가능했던 ‘갑자기 시작된 사랑’이다.


키스했을 때 나는 태어났다. 딕슨과 로렐의 행복한 한때 ⓒ

불같은 사랑이 시작된 후 딕슨은 밀드레드가 좋다고 한 소설을 잠도 자지 않고 불같은 속도로 시나리오화 해 나간다. 딕슨이 쓴 대본을 로렐 역시 밤새 타이핑 한다. 주위의 걱정과 만류에도 더 없이 행복해하는 두 연인. “이보다 행복한 적은 없었어”, 정말이지 꿀 떨어지는 나날을 보낸다.


“그녀와 키스했을 때 나는 태어났다. 그녀가 떠났을 때 나는 죽었다. 그녀와 함께한 몇 주 동안 나는 산 것이다.”


딕슨이 시나리오의 어디엔가 넣고 싶어 한 문장이다. 글은 예언의 마력을 부린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잘하는 연인이지만, 몇몇 타인에겐 예고도 없이 폭력적인 딕슨의 괴팍함. 내게 오는 피해가 아니라고 눈감아도 될까. 정말 내게 올 일이 없을까. 불안은 두려움을 부르고, 두려움은 믿음을 흔든다. 믿음이 불신이 되는 순간 두려움은 공포가 되고, 한순간도 함께할 수 없는 끔찍한 타인이 된다.


떠났을 때는 나는 죽었다. 행복의 절정에서 고독의 나락으로… ⓒ

나와 키스했을 때 그제야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표현, 이보다 낭만적 고백이 있을까. 좋을 땐 첫 문장이 크게 들린다. 아니 세 번째 문장까지 들어도 ‘너 없으면 난 살 수 없다’는 표현에, 그것도 거친 마초남이 건네는 진심에 여자는 자꾸만 현실을 외면했을 것이고 나에게 집중하는 그 남자만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섬이 되는 관계는 결코 아름다울 수도 없고, 오래가기도 어렵다.


모든 부메랑은 내게로 돌아온다. 딕슨이 던진 부메랑이 길 가다 차 시비 붙은 사람을 해하고, 20년간 자신의 곁을 지켜준 친구이자 에이전시인 멜을 다치게 하고, ‘내 인생의 여자’를 아프게 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은 없다. 가장 큰 상처는 자신에게 남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딕슨, 달라질 수 있을까. 남도,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도 해치지 않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운명의 사랑을 잃고 영원히 ‘고독한 영혼’으로 돌아갈까. 둘이어도 혼자여도 고독한 건 마찬가지라면, 그래도 둘인 게 낫지 싶은데 딕슨 스틸의 곁에는 자신의 그림자 외엔 보이지 않는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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