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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㉕]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는 일본 승리의 제물이었을까?


입력 2021.04.20 14:00 수정 2021.04.20 15:31        데스크 (desk@dailian.co.kr)

러시아 전함 'PobyedaⓒPenny Illustrated Paper, 25 June 1904.(The British Newspaper Archive)

요즘 역사 관련 대중 프로그램이 참 많아진 것 같다. 모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서 최근 ‘러일전쟁’을 주제로 2주에 걸쳐 방영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다양한 역사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매체에서 다룬 내용이다. ‘흥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여러 요소를 첨가하기는 했지만,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대중의 눈높이 역시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 강연자는 ‘러일전쟁’을 20세기 초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 사건으로 소개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러일전쟁이라는 주제를 풀어내는 강연자와 관련 전문가 그리고 이를 배우는 연예인의 조합이 매우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다른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여기서는 프로그램에서 다루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중심으로 ‘러일전쟁’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를 중심으로 바라본 러일전쟁 같은 것이다.


1904년 초 러시아와 일본 간의 외교 교섭이 성과 없이 끝난 직후 일본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 해군은 제물포에서 러시아 해군을 선제공격했고, 이어 여순항을 기습 공격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여순항에 몰아넣고 봉쇄한 후 무력화시켜 황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목적이었다.


러시아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원령을 발령하여 병력을 소집하고, 집결한 부대를 동북아시아로 이동시켰다. 부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러시아는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 역시 증원했다. 8월에는 발틱함대를 제2태평양 분함대로 편성하여 동북아시아를 향해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 함대의 임무는 여순항에 갇혀 있는 태평양 함대를 구출하여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발틱함대의 상당수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신형 전함이 포함된 주력함이 문제가 됐다. 이들은 희망봉을 돌아 집결지를 향했다. 누군가는 영국이 의도적으로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막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 영국은 수에즈 운하 사용에 대해 중립을 선언하였기에 러시아 함대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러시아 주력 전함 중 특히 신형 전함의 경우 수에즈 운하의 통과 규격보다 폭이 넓어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희망봉으로 우회한 것이었다. 실제로 발틱 함대의 구형 전함 중 상당수는 수에즈 운하의 통과 규격에 적합해서 별 문제 없이 통과하여 중간 집결지로 향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 등 주요 서방 언론도 러시아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자연스럽게 보도했고, 우리나라 언론(<제국신문> 1905. 3. 17., ‘발틱함대가 소환되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함’)도 이를 보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교과서에서는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이 러시아 함대의 이동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탄같은 연료 보급 등을 영국이 거부한 것은 맞지만, 수에즈 운하의 사용까지 억지로 차단하여 러시아 발틱함대가 어쩔 수 없이 희망봉까지 우회하도록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국의 시간 끌기가 과연 동맹국 일본에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점도 짚어 보아야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것은 일본이다. 일본이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것은 그만큼 전쟁 지속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역시 내부 문제로 더는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누가 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는지 평가한다면 아무래도 일본이 더 절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애초에 단기결전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개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한 물자를 거의 소진했다. 여기에 약 7개월간의 여순 공방전을 거치면서 6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기고 막대한 자원을 소모한 상태였고, 기대했던 봉천 회전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반면 러시아는 애초부터 장기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전 직후부터 출발하기 시작한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이른바 ‘피의 일요일’ 이전까지 증원된 병력 규모만 해도 이미 일본 육군을 상회했다. 게다가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봉쇄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가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일본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오히려 발이 묶인 것은 일본군이었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본 해군은 성공적으로 여순항을 기습하여 봉쇄하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 함대가 신속하게 항구로 철수하면서 애초 목표한 무력화에는 실패했다. 결국 일본 해군은 여순항 봉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배후에서 여순항을 점령하는 작전에 육군을 투입해야 했다. 문제는 일본 육군이 여순항을 점령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러시아 함대를 봉쇄하는 데 투입한 일본 함대 역시 여순항에 계속 발이 묶여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전력 공백으로 이어졌고, 이 공백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의 작전 공간으로 변했다. 그 공간 중에는 일본군의 인후부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조선해협’ 지금의 ‘대한해협’이 있었다.


러일전쟁 중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태평양 분함대는 2월 8일 첫 출항을 시작으로 일본을 봉쇄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불과 7척의 함대로 일본 열도 전체를 봉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역으로 일본 해군 역시 일본 열도 전체를 방어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여순항 봉쇄에 일본 함대가 계속 묶이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는 일본으로 향하는 상선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15척의 상선이 침몰했다. 침몰한 상선의 규모는 미미하였지만, 운송 상의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당연히 운송 비용의 상승으로 직결됐다. 운송 비용의 상승은 섬이라는 특성상 수출입에 대부분의 자원을 의존하는 일본 경제에 적지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군사 측면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는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는 일본 함대와의 직접적인 교전은 회피하면서 주로 해저케이블을 절단하거나 수송선을 공격했다. 해저케이블 절단은 지휘 통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요 통신 케이블이 지나는 곳에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가 출현하자 일본 함대는 다케시키, 오키노시마, 쓰노시마, 쓰시마 등에 함대를 분산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 1] 조선해협 (1903년 일본 해군이 일왕에게 보고한 지도 중)ⓒ일본 방위성 연구소

결정적으로 6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는 당시 대한해협(1904년 당시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 중이던 영국 수로국 해도에도 ‘Korea Strait’라고 표기되어 있고, 일본이 사용 중이던 해도 역시 ‘朝鮮海峽’이라고 되어 있었다. ‘Korea Strait’라는 명칭은 19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영국 수로국 지도에서 단 한 번도 변경된 적이 없다.)에서 일본 육군 증원 병력을 수송하던 ‘히타치마루호’를 격침시켰다. 이로 인해 여기에 타고 있던 약 천여 명의 병력이 조선해협에 수장됐다. 이 소식은 ‘The fight in Korea Strait’라는 이름으로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됐다. 일부 신문에서는 ‘러시아의 역습’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뤘다. 그만큼 전황은 점차 러시아에 유리해지고 있었고, 개전 초 일본군의 우세는 점차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이후 일본 해군은 ‘울산 해전’에서 ‘조선해협 해전’의 치욕을 일부 만회한다. 울산 해전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여순항 탈출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 일부가 울산 인근 해역을 지나다가 일본 해군과 조우하여 벌어진 해전이다. 여기서 러시아 군함 1척이 격침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는 계속해서 일본 인근 해역을 중심으로 출몰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지도 2]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해안 요새 건설 계획ⓒ일본 방위성 연구소

러일전쟁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분함대의 활동은 전후 일본이 도쿄를 비롯해 해안과 인접한 주요 도시에 요새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러한 요새지는 주요 도시에 적절한 방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순항에 묶여버린 일본 함대와 일본 육군처럼 많은 군대를 도시 방어에 묶어버리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일본은 요새 건설에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했다. 하지만 이 요새는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마지노선)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쓸모없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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