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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인터뷰] 엄태구의 깊고 푸른 '낙원의 밤'


입력 2021.04.23 07:00 수정 2021.04.22 21:08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낙원의 밤', 제77회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넷플릭스

허스키한 목소리, 선 굵은 외모가 돋보이는 배우 엄태구.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영화 '밀정'에서 일본경찰 하시모토 역으로 등장했을 때, '안시성'에서 안타까움을 죽음을 맞은 파소를 연기할 때, '판소리 복서'에서 병구로 분했을 때,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그의 연기는 관객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짧게 등장한 '택시 운전사'에서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엄태구를 기억할 정도다. 그런 그가 영화 '낙원의 밤'의 선두에 서서 131분을 이끌어갔다.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의 신작으로 조직의 타깃이 된 한 태구(엄태구 분)와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재연(전여빈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엄태구는 운명처럼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역을 맡아 이번에도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연기를 선사했다. 찬란한 제주도의 풍경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드리우면 태구 내면의 슬픔은 더욱 깊게 번지기 시작한다.


엄태구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 태구의 인생을 지독하고 쓸쓸한 얼굴로 표현했다. 엄태구는 등장만으로 태구의 서사가 느껴질 수 있도록 외적인 부분부터 만들어나갔다.


"삶에 지쳐있고 누나의 병으로 조직의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는 태구의 이야기를 품 안에 담고 연기하려 했어요. 거친 비주얼을 위해 스킨 로션, 립밤을 안 발랐어요. 살도 9kg 증량했고요. 원래 살이 찌는 체질이 아닌데 보충제를 먹으며 몸무게를 늘리려고 했어요."


그는 매 순간 촬영에 들어가기 전 누나와 조카를 잃은 태구의 슬픔을 복기시켰다. 태구가 하는 모든 일의 이유는 누나와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과 떠나보낸 그리움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 때의 감정을 놓지 않음으로써 지금의 태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엄태구 역시 가족을 인생의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태구의 감정에 깊게 이입할 수 있었다.


"공감하지 않으면 연기하기 어려워 매번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매신, 매컷마다 감정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촬영했어요."


ⓒ넷플릭스

엄태구는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태구 역을 맡는 것이 운명이고, 새롭게 느껴졌다고 한다. 박훈정 감독이 혹시 자신을 염두하고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닌가 기대를 품었지만, 아쉽게도 박 감독의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을 믿고 캐스팅해준 박훈정 감독의 결정만으로도 그가 '낙원의 밤'에 모든 걸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감독님이 모험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밀정' 때 현장이 생각났죠. 그 때도 김지운 감독이 절 믿고 모험을 하신 거였어요. 당시 제가 현장에서 하시모토 역할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믿어주셨고, 그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낙원의 밤'도 실망시키지 않고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과 마음가짐이 컸어요."


누아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절정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은 영화 초반 사우나 신과 중반 카체이싱 신이다. 엄태구 역시 이 장면 만족감을 보였다.


"사우나 신은 정말 부끄러웠고 시간이 지날 수록 외로웠어요. 스태프는 옷을 다 입고 저만 벗고 있었거든요. 이 장면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촬영했는데 습하고 더운 사우나 안에서 스태프들이 땀을 흘리며 함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잘해야겠다고 또 생각하기도 했고요. 자동차신은 무술팀이 잘 받아줬어요. 무술팀이 고생이 많았죠. 그 분들 덕분에 완성도 높은 장면이 나올 수 있었어요."


극중 태구는 제주도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재연을 위해 목숨까지 건다. 단기간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관계를 엄태구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태구는 인생의 전부였던 누나와 조카를 사고로 잃잖아요. 그 순간 살아갈 목적이 없어져버린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재연을 만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재연에게 누나와 조카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의 일에 개입하게 된 것 같아요. 누나와 조카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이 재연을 향한 희생으로 바라봤어요. 재연이 누나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하고, 태구 같기도 했고요. 재연의 삼촌 죽음으로 급속하게 더 재연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태구와 재연의 관계는 연민, 동질감, 사랑 사이에서 묘하게 서성인다. 엄태구는 세 감정 모두 사랑이란 감정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어떤 감정에 더 이입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감상을 가져가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연민과 동질감도 사랑이라고 본다면 두 사람이 사랑을 느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연밀과 동질감과 사랑이 다른 성질이라면, 태구는 재연에게 사랑보다는 동질감이 더 컸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아쉬운 점은 없었냐는 질문에 엄태구는 수줍게 웃으며 답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란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지만 말씀드리면 그 부분 집중적으로 보실 것 같아 비밀입니다.(웃음)"


박훈정 감독과 함께한 작업은 엄태구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박훈정 감독의 '잘했어' 한마디가 지치지 않고 달려 나갈 원동력이 됐다. 또 이번 현장은 감독, 배우, 스태프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을 온전히 받은 작품이었다고.


"컷 하시고 ‘태구 잘했어’라고 한마디 씩 해주셨어요. 촬영 다 끝나고도 영화 다 보시고 ‘잘했어’라고 말씀해주셨죠. 그게 힘이 많이 됐어요. 현장에서 느낀 박훈정 감독님은 강인하고 기둥 같은 분이었어요. 리더십도 자연스럽게 느껴졌죠. 그리고 촬영 끝나면 배우들, 스태프들 다 모여서 그날 현장 편집본을 같이 봐요. 이후엔 수고했다고 박수치며 끝내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모두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죠."


인터뷰 내내 엄태구는 질문 하나에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카메라 밖의 엄태구의 모습은 '낙원의 밤'에서 봐왔던 연기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웃음과 수줍음이 많았다. 원래의 모습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게 어렵지는 않을까.


"제 안에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것 같아요. 직업이 이렇다 보니 외부에서 영감을 끌어들이거나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시도해요. 내 안에 나약한 것들도 끄집어보고요. 선한 모습도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대편의 모습도 있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이 촬영장 안에서 저질러보거나 해볼 수 있는 직업이라 캐릭터와 상황에 맞게 진정성 있게 임하려고 해요. 한 번은 지인이 욕 하는 게 어색하다고 해서 몇 년 동안 집 안에서 욕만 연습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배우로서 엄태구가 행복을 느낄 때는 만족스러운 연기를 펼치고 차에 탔을 때다. 인터뷰 내내 보여줬던 모습처럼 정감 있는 답변이었다.


"저를 믿어주신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한 작품 한 작품 잘 해나가고 싶어요. "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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