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차 중 아무 데나 재생해도 명대사가 나온다. 극본을 쓴 정현정 작가의 필력은 7년이 지나도 유효하다. 70년 후에도 많은 이가 공감할 것이다. 사랑 좀 해 본 건지 징글징글한 사랑을 하는 친구들의 연애 상담을 도맡아 한 건지, ‘현실 연애’를 그리는 가운데 우리가 뱉어봤고 들어봤음 직한 외침이 대사로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답게 귀에 쏠 들어오게 명문장으로 적었으되 결코 어려운 표현도 없이 심장을 두드린다.
가장 마음에 드는 지점은 사랑의 시작, 설렘으로 시작해서 어긋나고 오해하고 토라지다가 연애를 시작하는 데서 이야기가 끝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를 알아보고 무르익는 과정이 아니라 이별 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별 후의 얘기를 통해 사랑을 드러내니 이토록 그 본질과 실체가 선명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손에 잡힐 것 같지 않던 사랑이 적어도 손끝에 닿는 느낌이다.
한여름: 헤어지자. 힘들어서 못 하겠어. 혼자만 속 끓이고, 혼자만 너 기다리고, 혼자만 너 쳐다보고, 둘이 있어도 너무너무 외롭고. 이런 게 연애니? 나 사랑한다면서,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헤어져, 여기서 시작했으니까 여기서 끝내자.
강태하: 남들도 다 그래. 5년이나 됐으면 무덤덤할 때도 됐잖아, 어떻게 연애가 매일 뜨겁니?
2009년 여름, 연애 5주년 기념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차역 플랫폼에서 헤어진 한여름(정유미 분)과 강태하(문정혁 분). 이조차도 5년 전 회상이고, 현재는 이별 5년 뒤 2014년이다. 사랑이 시작된 곳에서 사랑을 끝내는 두 사람. 둘은 왜 헤어졌을까.
“기차를 탄 지 10분도 안 됐는데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 남자는 변했구나. 이 연애는 끝났구나’, 온몸으로 느꼈고,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난 그때 기댈 데가 필요했거든요.”(한여름)
강태하는 2014년, 얘기한다. 왜 헤어진 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친구로 지낼 수도 있으니 다시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한여름은 진절머리를 낸다, 헤어진 남자와 왜 다시 만나느냐고. 자신에겐 근사한 남자친구도 있다고 선을 긋는다. 둘은 정말 왜 헤어졌을까.
한여름: 니(네) 기억이 그렇게 정확해? 백 번을 생각해도 니(네) 기억이 맞아? 그럼 언제였는지 짐작이라도 하겠네. 잘 생각해봐 언제였는지. 첫 번째 전화가 있었고, 두 번째 전화가 있었고 세 번째, 네 번째 셀 수 없이 많은 전화가 있었을 거야. 넌 그때마다 바쁘다고 했고, 이유가 뭔지 묻지도 않았어. 네가 바빠서 못 오겠다고 한 그 수 많은 날 중에서 어느 날이었는지 잘 생각해봐. 그런 날이 너무 많아서 넌 기억도 못 할걸?
강태하 : 그때 정확하게 이야기를 했었어야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내가 필요하다고!
한여름 : 이유를 몰랐어도 그런 전화가 계속됐으면, 넌 한 번은 왔어야 했어!
사랑이 시작되는 데에는 3분이면 되지만 사랑을 끝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좋아하니까 참고 기다리고 잘해준 건데, 원래 이런 애인가 하며 막대하기 시작하면서 서운함이 생기고 원망이 쌓이고 미움이 싹튼다. 그런 채로 오늘만 그런 거겠지, 나아지겠지, 시간을 축낸다. 기차에서 입 꾹 다물고 있었다고, 여자친구 표정이 좋지 않은데 모른 척했다고 이별을 통보하다니, 말이 돼? 맞다, 말 안 된다, 그런 건 없다. 이미 끝난 사랑을 그날 확인했을 뿐이고, 이런저런 놓지 못하던 손을 그날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말을 했으면 알까.
한여름: 말을 안 해서 모르는 남자는 말을 해줘도 몰라.
연애에도 갑을관계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있어선 안 되는 관계가 연애에도 파고든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 한여름은 강태하에겐 을이었지만, 남하진(성준 분)에게는 갑이다. 여름이 스스로 말하듯, 지나간 연애를 통해 주도권을 잡는 법을 배웠다. 을의 가슴은 탄다.
남하진: 내가 더 좋아하니까 그렇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해, 너랑 내 관계. 내가 더 좋아하니까 싸우고 싶을 때도 있고, 도대체 너는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을 때도 있는데, 왜 참고 넘어가는지 알아? 내가 져주지 않으면 헤어지게 될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져줄 수밖에 없어. 내가 져주지 않으면 헤어지게 될 것 같으니까. 내가 져주지 않으면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느낌, 그 느낌이 얼마나 싫은 줄 알아?
7년 전, 성준이 연기하는 하진을 응원하며 드라마 ‘연애의 발견’(연출 김성윤·이응복, 제작 JS픽쳐스, 편성 KBS2)을 봤다. 깊은 배려 속에도 여름이의 등만 바라보는 신세인 하진이 안쓰러웠다. 하진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랐다. 한 번 데인 걸로도 모자라 또다시 태하에게 흔들리는 여름이 미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걸 배웠어요. 그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다른 사람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잖아요.”(남하진)
7년 후 다시 보니, 하진을 위해서도 여름과의 연애는 멈추는 게 맞다. 사랑은 함께하는 거다. 한때 서로 사랑한 때가 있었겠지만, 지금 한 사람이 다른 곳을 본다면 비록 내 준비가 안 됐더라도 사랑이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하진: 내가 너 보내준 것도 아니고, 네가 간 것도 아냐. 나는, 너하고 만나면서 행복하지가 않았어, 여름아. 늘 불안했고, 불안한 마음 감추기 위해서 노력했고, 사랑받고 싶었고, 그랬어. 강태하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행복하려고 노력했지만 행복하지가 않았어, 그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야.
평등은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고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특히나 연인 관계에서는 꼭 함께해야 한다. 평등하지 못한 관계, 더 좋아하는 쪽이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 배려를 받는 상대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관계는 반드시 끝이 온다. 여름과 태하처럼, 하진과 여름처럼.
“연애도 일종의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권력관계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고, 강자와 약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가 되는 거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더 기다려주고, 많이 참아주는 쪽, 옛날에는 제가 약자였어요. 항상 그 사람 마음이 궁금했고, 더 많이 받고 싶고, 모든 기준이 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지옥 같았어요.”(한여름)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연애가 끝나봐야 누가 강자인지 누가 약자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 강자예요. 나처럼 사랑받기만 했던 사람은 후회와 미련이 남잖아요. 그렇게 되면 평생 그 사랑을 잊을 수 없게 되거든요. 강자는요, 좋아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해 보고, 해 볼 만큼 다해 본 그런 사람이 강자예요.”
역시나 답은 어른에게서 나오는 걸까, 엄마에게서 나오는 걸까. 먼저 태어나 더 오래 산 것에도 ‘덕’이 있다. 드라마 작가인 여름이 엄마 신윤희(김혜옥 분)는 정현정 작가를 대신해 우리에게 말한다.
신윤희: 항상 옳지 않아도 돼. 남한테 칭찬받으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 네 마음을 한참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 마음도 보여. 기준을 ‘너’로 두고 더 오래 생각하라는 거지.
사랑할 때 한여름의 기준은 강태하였고, 남하진의 기준은 한여름이었다. 아름다워 보이지만, 아니다. 결국,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이 다른 이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도 이별도 두 사람이 하는 일인데 참 다르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기적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이별은 둘 중 한 사람의 사랑만 끝나도 다가온다. 서로를 좋아할 때의 마음은 하나였는데, 이별에 대해선 동상이몽이다. 그럼, 사랑하지 말 일인가. 아니다. 사랑은 하고 말고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정신 차려보면 사랑은 시작돼 있다.
“그런 거 있잖아, 그냥 사랑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좋아하게 되는 거, 그런 거 몰라?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좋아지게 되는 사람. 그리고 좋아하는 것과 동시에 ‘아, 이게 사랑이구나’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먼저 알게 되는 그런 사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사람.”(한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