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실적 발표일에 이례적으로 '경영진 책임' 메시지
'한 수 아래' SK하이닉에 뒤쳐진 영업이익, HBM 경쟁력 부진 등 위기감
'애니콜 화형식' 비교 시각도…연말 대규모 인적 쇄신 가능성
#포지티브적 해석 : 철저한 반성은 반등의 원동력이 된다.
#네거티브적 해석 : 애니콜 대신 던져질 화형식의 제물은?
삼성전자가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한 지난 8일, 반도체를 담당하는 DS 부문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은 이례적으로 고객과 투자자, 임직원들을 향한 ‘반성문’을 발표했습니다.
역대 최대 분기 매출(79조원)을 기록하고도 10조원을 밑도는 영업이익(9조1000억원)을 내면서 시장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원흉이 반도체 사업이었음을 시인하는 일종의 자기고백이었습니다.
물론 반도체 사업이 회사 전체의 실적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건 아닙니다. 잠정 실적 발표에서 부문별 실적은 공개되지 않지만 DS부문의 영업이익은 4조원대로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진 걸로 파악됩니다.
다만 5조원대를 예상했던 DS영업이익이 4조원대로 떨어지며 삼성전자 전체 실적도 10조원 달성에 실패한 것이죠.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회사 실적이 좋건 나쁘건 반도체가 일등공신, 혹은 원흉으로 지목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더라도 기업이 실적 발표 당일 ‘자기반성’에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보통 영업이익이 좋지 않으면 매출을 부각시키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대외 경영환경 악화에도 선방했다’고 ‘자기방어’에 나서기 일쑤죠.
전영현 부회장의 반성문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합니다.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에 대해 사죄하는 것을 넘어 “근원적인 기술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고 잘못을 털어놨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부진의 주요 배경으로는 메모리 반도체 ASP(평균판매가격) 하락이 꼽히지만, 실적 악화가 ‘삼성 위기론’까지 이어지도록 한 원인으로는 5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인 HBM3E의 엔비디아 승인 지연과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경쟁력 약화가 지목됩니다.
단순히 업황 악화가 실적 부진의 원인이었다면 같은 메모리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도 울상이어야 하지만, 올 3분기 이 회사 영업이익은 6조8000억원 내외로 예상됩니다. 삼성전자 DS 부문이 ‘대외 경영환경 악화에도 선방했다’고 변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한 수 아래로 봤던 SK하이닉스에 분기 영업이익에서 2조원이나 밀리는 것은 삼성전자로서는 굴욕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은 HBM 경쟁력입니다.
인공지능(AI) 붐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GPU와 짝을 이뤄 빠른 연산을 돕는 HBM 시장 역시 확대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HBM의 가격은 메모리반도체 중에서는 높은 축에 속하죠.
즉, HBM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면, 메모리반도체 업황이 고꾸라지더라도 물량이나 수익성 측면에서 충격을 완화해 줄 ‘믿을 구석’이 있다는 얘깁니다.
전세계 GPU 시장을 지배하는 곳은 엔비디아고, HBM 제조사는 엔비디아로의 납품 여부에 실적이 좌우됩니다.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그걸 해왔지만,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그걸 못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 하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삼성전자는 3분기 실적 참고자료에서 “HBM3E의 경우 예상 대비 주요 고객사향 사업화가 지연됐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HBM 시장에 대한 오판이 삼성전자를 이 시장에서 뒤쳐지게 만들었고, 메모리반도체 시장 맹주로 오랜 기간 군림해온 ‘구력’이 있다고 하지만 단기간 내에 격차를 좁히는 건 무리였나 봅니다.
이는 비단 3분기 실적에서 뿐 아니라 앞으로도 메모리반도체 업황이 부진할수록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반성 뒤에는 각오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통렬한 반성을 내놓은 전영현 부회장의 다음 스탭은 무엇일까요.
일단 전 부회장이 어떤 배경으로 DS부문 수장을 맡게 됐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 부회장은 지난 5월 삼성전자에서는 이례적인 ‘원 포인트 인사’로 전임자인 경계현 사장과 자리를 맞바꿨습니다. 반도체 실적 부진으로 ‘삼성 위기론’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2000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로 입사해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입니다. 2017년까지 DS부문 메모리사업부장으로 근무하다 삼성SDI 대표이사를 거쳐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DS 부문에는 7년 만에 복귀한 셈이죠.
DS부문장 복귀 이후 전 부회장은 다소 느슨해진 조직 문화를 지적하면서 분위기 쇄신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합니다. ‘나 없는 사이에 조직이 왜 이 모양이 됐느냐’는 식이 아니었을까요.
3분기 실적은 그의 취임 이후 첫 분기 실적입니다. 자신이 책임질 첫 실적을 놓고 수장이 반성문을 내놨으니 임직원들은 더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전 부회장의 반성문을 1995년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애니콜 화형식’과 비교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품질 혁신을 외치며 15만대의 애니콜을 산산조각 내 불태운 충격요법은 삼성전자가 ‘품질의 삼성’으로 도약하는 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그룹 총수였던 이건희 선대회장과 전문경영인인 전 부회장이 벌일 수 있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반도체를 가지고 그런 식의 퍼포먼스를 벌이기엔 무리도 있고, 요즘은 뭐든 불태운다면 환경단체 반발도 심할 겁니다.
하지만 인적쇄신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습니다. 삼성전자 DS부문 임원은 2분기 말 현재 438명으로 SK하이니스(199명)의 2배를 넘습니다. 3분기 영업이익이 삼성전자 DS부문보다 2조원 이상 높을 것이라는 SK하이니스 말입니다. 연말 임원인사에서 29년 전 애니콜의 신세가 될 분들이 꽤 많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3분기 실적 부진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히는 비메모리(파운드리, 시스템LSI) 사업도 만성 적자에서 벗어날 특단의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입니다. 다만 항간에서 예상했던 비메모리 분사는 없을 것이라는 총수의 공언이 있었습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 잠정 실적 발표를 하루 앞둔 지난 7일 필리핀 현지에서 로이터통신이 이 질문을 하자 “분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이 신사업 부문을 분사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분사해도 혼자 살아남을 경쟁력을 갖췄거나,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아 ‘본진’까지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될 때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나 시스템LSI 사업을 분사한다면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됩니다.